사르트르와 메를로-퐁티: 두 지식인의 삶, 행동, 철학

주성호(서울대학교 철학과 강사)


    


  사르트르와 메를로-퐁티는 여러모로 비교되는 20세기 프랑스 철학자이다. 그들은 비슷한 연배에 동일한 학교에서 공부했고, 나치에 저항하는 단체에 함께 가입하여 행동했으며, 실존철학으로 불리는 철학을 수립하기도 했다. 또 그들은 공동으로 현대라는 잡지를 창간하였고, 이 잡지를 통해 정치적으로 한목소리를 내기도 했으며, 한국전을 계기로 정치적 입장의 차이를 보이며 결별하기도 했다. 잘 알려진 것처럼 보부와르는 사르트르의 연인이었지만, 사실 그녀는 사르트르와 만나기 전에 이미 메를로-퐁티의 친한 친구이기도 했다. 이런 두 사람의 특별한 관계로 사람들은 종종 그들을 따로 언급하지 않고 함께 언급한다. 두 사람을 철학의 관점에서 언급하기도 하고, 20세기 프랑스 지성사나 정치적 활동의 관점에서 언급하기도 하며, 아니면 두 사람의 인생 자체에 대해서 언급하기도 한다. 우리는 이 글에서 흥미로운 두 사람의 관계를 그려보고자 할 것이다. 20세기 프랑스를 대표하는 두 철학자가 서로 만났던 학창 시절, 그들의 철학의 형성 과정, 한국전쟁과 관련한 그들의 정치적 행동을 그려볼 것이다.


 

사르트르와 메를로-퐁티의 학창 시절


사르트르는 1905년에, 메를로-퐁티는 1908년에 태어났다. 둘 다 어릴 때 일찍 아버지를 여의었다. 사르트르는 1922년에, 메를로-퐁티는 1924년에 고등학교 정규과정을 끝내고, 고등사범학교 입시준비반에 들어갔다. 그들은 동일한 입시준비반에 들어갔는데, 루이--그랑(Louis-le-Grand) 고등학교에 설치된 입시준비반이었다. 그리고 2년 동안의 고등사범학교 입시준비반 과정을 끝내고, 사르트르는 1924년에, 메를로-퐁티는 1926년에 역시 동일한 고등사범학교, 즉 파리의 윌름(Ulm) ()의 고등사범학교에 입학했다.

사르트르와 메를로-퐁티는 고등사범학교 시절, 어떤 싸움을 통해 처음 만나게 되었다. 메를로-퐁티는 고등사범학교 학생들이 모여 있는 곳에서 몇몇 학생들이 부르는 노래를 듣고, 그 노래가 외설적이라 생각해서 그 학생들을 향해 야유의 휘파람을 불었다. 야유의 휘파람을 들은 학생들은 메를로-퐁티를 때리려 했고, 그때 사르트르가 개입하여 메를로-퐁티는 위기를 모면하게 되었다. 이 사건으로 처음 알게 된 두 사람은 서로에 대해 좋은 첫인상을 가지게 되었다. 그 후 그들은 서로에 대해 좋은 관계를 유지하였지만, 앞서 언급한 것처럼 한국전을 계기로 서로 다른 정치적인 견해를 갖으면서 결국엔 결별하게 되었다.

사르트르는 1928년 교수자격시험에 낙방하였다. 그다음 해에 사르트르는 다시 시험을 보려고 시험 준비를 하던 중, 소르본 여대생인 보부아르를 만났다. 그들은 함께 시험공부를 하였고, 사르트르는 교수자격시험에서 1등으로, 보부아르는 2등으로 나란히 합격하였다. 이어서 곧 그들은 계약결혼을 하였고, 서로에게 평생의 사상적 반려자가 되었다

보부아르는 사르트르를 만나기 몇 해 전에, 메를로-퐁티를 먼저 알게 되었다. 보부와르는 메를로-퐁티의 집에 놀러 갈 정도로 메를로-퐁티와 친하게 지냈다. 그 당시 보부아르에게는 둘도 없는 엘리자벳 라쿠앵(E. Lacoin)이란 친구가 있었다. 그 친구는 보부와르를 통해 메를로-퐁티를 알게 되었고 결혼의 말이 오고 갈 정도로 메를로-퐁티와 사귀었다. 그러나 1929년 가을 보부아르의 친구는 갑자기 병에 걸려 죽는데, 보부아르는 메를로-퐁티 때문에 자신의 친구가 죽었다고 생각했다. 보부아르는 친구의 청혼을 메를로-퐁티가 받아들이지 않은 것이 친구가 죽게 된 주된 이유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보부와르는 수 년 동안 메를로-퐁티와 소원한 관계 속에 있었다. 사실 메를로-퐁티도 결혼하고 싶어 했다는 것을 보부아르는 약 30년 후 알게 되었고, 그 사실을 알기 전까지 보부아르는 친구의 죽음에 대해 언제나 메를로-퐁티를 원망하였다.

 


1930년경 철학적 상황과 프랑스 실존철학(현상학)


사르트르와 메를로-퐁티는 종종 프랑스 실존철학 또는 프랑스 현상학을 나타낸다고 언급된다. 프랑스 현상학과 프랑스 실존철학은 의미가 다른 말이지만, 이 말들이 사르트르와 메를로-퐁티의 철학을 종종 가리키기 때문에 사실상 동의어로 이해될 수 있다. 사르트르와 메를로-퐁티는 현상학의 창시자인 독일의 후설(Husserl) 철학을 도입하여 프랑스식 현상학을 개화시켰는데, 사람들은 그들의 현상학을 종종 실존철학이라 부른다. 프랑스식 현상학이라 불릴 만큼 그들의 철학은 독일 현상학(후설)과 다른 모습을 보이는데, 그것은 그들의 철학이 프랑스의 철학적 전통에서 자연스럽게 형성되었기 때문이다.

사르트르와 메를로-퐁티가 고등사범학교를 다니던 시절 프랑스의 철학적 상황을 살펴보면, 그들이 고등사범학교 졸업 후 어떻게 자신들의 실존철학 또는 현상학을 형성할 수 있는지 볼 수 있다. 메를로-퐁티는 죽기 2년 전 1959년에 파리 대학기숙사 캐나다관에서, "실존의 철학"에 대해 강연하면서, 1930년경 프랑스에 있었던 두 가지 철학의 경향을 언급한다. 하나는 레옹 브렁슈빅(L. Brunschvicg)의 철학이고 다른 하나는 베르그송(Bergson) 철학이었다. 브렁슈빅은 강단에서 반성철학(philosophy of reflection)을 가르쳤다. 브렁슈빅이 가르친 반성철학은, 데카르트에서 칸트로 이어지는 코기토(Cogito) 철학이었고, 메를로-퐁티는 브렁슈빅을 통해 자신과 사르트르가 데카르트와 칸트를 알게 되었다고 말한다. 다른 한편 베르그송은 브렁슈빅과 정반대의 철학인 직관의 철학(philosophy of intuition)을 주장했다. 베르그송의 직관의 철학은 반성철학의 코기토, '사유하는 나'를 받아들이지 않으며, 세계에 밀착하여 세계와 하나가 되려는, 공감(sympathy)의 철학을 나타낸다. 그 당시 베르그송은 은퇴하여 더 이상 강단에서 학생들을 가르치지 않아서, 메를로-퐁티와 사르트르는 직접 배울 기회가 없었다. 그러나 베르그송의 철학은 그들에게는 이미 고전이 된 철학이었고, 고등사범학교 입시준비반 시절 사르트르와 메를로-퐁티는 베르그송을 많이 공부하였다.

이러한 상황은 사르트르와 메를로-퐁티가 새로운 철학을 형성하는 데 배경이 되었고, 그들이 후설 현상학을 수용하는 데 큰 영향을 주었다. 사르트르와 메를로-퐁티는 그들의 스승인 브렁슈빅의 반성철학이 "고공비행적 사유"라고 비판했다. 브렁슈빅이 말한 코기토(사유하는 나)'지성적인 나'로서 역사적이고 문화적인 상황이나 맥락과 분리된 채 세계를 고공비행하며 초시간적인 진리를 포착하기 때문이었다. 사르트르와 메를로-퐁티는 베르그송의 직관철학처럼 '구체성의 철학'을 하기를 원했다. 시대적 배경과 상황 속에서 만난 세계에 밀착하여 구체적으로 나타난 세계를 기술하기를 원했다. 그렇지만 그들은 베르그송의 직관 철학이 너무 세계에 밀착해 세계를 '바라보는 나'를 상실했다고 비판했다. 이런 철학적 상황 속에서 사르트르와 메를로-퐁티는 후설의 현상학을 만났다. 그들에게서 후설의 현상학은 베르그송적인 구체성의 철학을 할 수 있게 하면서도 베르그송과 달리 세계 속에서 여전히 있는 ''를 구할 수 있는 방법론으로서 보였다. 다시 말해 세계에 밀착하여 구체적 세계를 포착하면서도 브렁슈빅의 지성적 자아()와 다른 ''를 확보하는 것이 그들의 철학의 목표였는데, 현상학이 그런 철학적 목표를 실현시켜 줄 것으로 그들은 생각하였다.

 

사르트르는 1933'살구 칵테일' 사건이라 할 수 있는 한 사건을 계기로 본격적으로 후설의 현상학을 공부하기 시작했다. 사르트르의 고등사범학교 동급생인 레이몽 아롱(R. Aron)은 독일 베를린에서 1년간 공부하고 1933년에 파리로 돌아와 사르트르와 보부와르를 만났다. 그들은 한 카페에서 모여 살구 칵테일을 주문하였고, 아롱은 독일에서 연구하고 있었던 현상학을 그들에게 이야기해 주었다. 살구 칵테일을 두고 아롱의 질문에 제대로 답을 못하며 당황한 사르트르는 후설을 공부하기 위해 독일 베를린으로 떠났다. 보부와르는 그의 자전적 소설 나이의 힘(1960)에서 그때의 상황을 생생히 다음과 같이 묘사한다.

 

한편 사르트르는 독일 현상학에 관한 이야기를 듣고 무척 솔깃했다. 레이몽 아롱은 베를린의 프랑스연구소에서 그 해를 보냈고, 역사에 관한 박사논문을 준비하면서 후설을 연구했다. 아롱이 파리에 왔을 때, 사르트르에게 후설에 대해 얘기했다. 우리는 몽파르나스 거리의 베크 드 가즈(Bec de Gaz)에서 저녁나절을 함께 보냈다. 우리는 그 집의 특별 메뉴인 살구 칵테일을 주문했다. 아롱은 자신의 잔을 가리키며, “이봐 친구, 네가 현상학자라면 이 칵테일에 대해 말할 수 있고, 그것이 철학이 되겠지!”라고 했다. 사르트르는 이 말에 흥분해서 창백해졌거나 거의 그런 것처럼 보였다. 이것은 바로 그가 수년간 원했던 것이었다. 즉 사물을 만졌던 모습 그대로 사물에 대해 말하는 것이 철학이어야만 한다는 것이었다. 사르트르는 관념론과 실재론의 대립을 넘어서는 것에, 의식의 주도적인 힘(souveraineté)과 우리에게 주어진바 그대로의 세계의 현전을 동시에 주장하는 것에 몰두했는데, 아롱은 사르트르가 몰두했던 것에 현상학이 정확히 대답해 준다고 확신시켜 주었다. 사르트르는 생 미셸 거리에서 후설에 관한 레비나스의 책을 구입했다. 그리고 무척이나 빨리 알고 싶어서, 페이지조차 자르지 않은 책을 걸어가면서 넘겨보았다.(...) 사르트르는 후설을 진지하게 연구하기로 결심했다. 그리고 아롱의 부추김에 의해, 다음 해 그의 작은 친구[아롱]를 뒤이어 베를린의 프랑스연구소에서 보내기 위한 필요한 절차를 밟았다.[각주:1]


메를로-퐁티는 사르트르가 1년간 독일에서 후설 현상학을 공부하고 돌아와서는 자신에게 후설을 읽으라고 권고했다고 말한다. 사르트르는 자신이 독일에 있을 때 메를로-퐁티 역시 프랑스에서 자신처럼 후설을 공부하기 시작했다고 말한다. 누구 말이 맞든지 간에, 1933년경서부터 사르트르와 메를로-퐁티는 본격적으로 후설의 현상학을 연구하면서 자신들의 철학을 형성해 나가기 시작했다. 그것은 앞서 언급한 것처럼 구체적인 사물에 몰두하는 베르그송의 철학적 방향 속에서 후설의 현상학을 수용하는 것이었다. 달리 말해 사르트르와 메를로-퐁티의 철학은 베르그송적인 구체성 철학 속에서 있으면서도 후설의 현상학처럼 현상 내에서 철학적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베르그송의 철학은 현상을 넘어서는 형이상학이었고, 그것은 사르트르와 메를로-퐁티 입장에서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었다. 이처럼 사르트르와 메를로-퐁티는 한편으로는 베르그송적인 형이상학을 넘어서기 위해 후설을 읽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베르그송적인 분위기에서 후설을 읽었다. 그들이 후설을 열심히 읽으면서 본격적으로 자신의 철학을 형성할 때(1933~1936) 그들은 베르그송 철학에 무척 비판적이었지만, 그들의 철학의 형성에는 베르그송 철학이 상당한 토대가 되었다. 이처럼 사르트르와 메를로-퐁티는 후설의 현상학을 읽음으로써 후설과 다른 그들 자신의 현상학, 이른바 프랑스 현상학 또는 프랑스 실존철학을 형성할 수 있었다.

 


대립하는 사르트르와 메를로-퐁티의 철학


사르트르와 메를로-퐁티는 자신들의 철학을 형성할 때 후설 철학과 베르그송 철학을 동일하게 읽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들은 후설과 베르그송을 서로 관점에서 읽었다. 메를로-퐁티가 후설 현상학에서 의식과 대상의 사이의 생생한 관계에 관심이 있었다면, 사르트르는 후설 현상학에서 의식의 능동성에 관심이 있었다. 또한, 메를로-퐁티가 베르그송의 물질 개념인 이미지속에서 의식과 사물의 순환적 관계의 가능성을 보았다면, 사르트르는 베르그송의 이미지 개념을 의식(코기토)이 결여된 지각으로 보았다. 결국, 이런 독서의 차이는 그들의 철학의 차이로 이어졌고, 그들의 철학은 사르트르의 경우 1943존재와 무라는 저서로, 메를로-퐁티의 경우 1945지각의 현상학이라는 저서로 표현되었다. 사르트르는 존재와 무에서 주체의 절대적 자발성 그리고 즉자존재(대상)와 대자존재(주체)의 이원론을 내세웠고, 메를로-퐁티는 지각의 현상학에서 우리의 지각에서 어디서 의식이 끝나고 어디서 사물이 시작되는지 분명히 알 수 없다는, 이원론을 벗어나려는 사유를 수행하려 했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사르트르와 메를로-퐁티의 철학은 상황 속에 있는 구체적 세계를 포착하고자 하였다. 사르트르 입장에서 인간에게 나타난 세계는 순수 의식 속의 이념화된 인식적 대상이 아니라 주체가 몰입하고 만나는 세계이다. “나에게서 이 컵은 물병의 왼쪽 조금 뒤에 있고, 피에르에 있어서 그 컵은 물병의 오른쪽 조금 앞에 있다. 그 컵이 한 의식에게 동시에 물병의 오른쪽과 왼쪽, 앞과 뒤에 있는 것처럼 주어지기 위해, 그 의식이 세계 위로 비상할 수 있다는 것[고공비행할 수 있다는 것]은 생각조차 할 수 없다.”[각주:2] 따라서 사르트르 말하는 대상은 주체와 연관을 맺고 있는 것처럼 보이며, 어디서 주체가 끝나고 어디서 대상이 시작하는지 알 수 없다는 메를로-퐁티의 철학과 차이가 없는 듯이 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르트르는 이와 같이 상황적이고 체험된 세계를 말하면서도, 즉자존재와 대자존재, 주체와 대상, 존재와 무를 과감하게 나눈다. 사르트르 철학에서 주체적인 것과 대상적인 것이 이원론적으로 명백히 구별되기 때문에, 컵과 나의 관계가 아무리 상황적이라도 나타나는 것(대상적인 것)은 조금도 주체적인 것에 속하지 않게 된다. 이로부터 사르트르는 대상의 특성이 없는 주체(인간)의 자유를 주장한다. 주체는 대상과 구별된 채로 자기 자신에게 투명하여 대상의 영향에서 벗어나 행동할 수 있다고, 즉 “인간은 자유롭도록 선고받았다.”라고 사르트르는 주장한다.

이와 다르게 메를로-퐁티의 철학은 주체와 대상을 사르트르처럼 명백히 구별하지 않는다. 메를로-퐁티는 사르트르가 존재(대상)와 무(주체)를 나눌 때 그것들이 어떻게 만날 수 있는지 묻는다. “내가 나를 부정성으로서 생각하고 세계가 긍정성으로 생각된다는 사실로부터, (...) 세계와 나 사이의 상호교류도, 만나는 지점도, 첩점도 없다. 왜냐하면, 세계는 존재이고 나는 아무것도 아니기 때문이다.”[각주:3] 물론 사르트르 입장에서, 모든 의식은 무엇의 의식이기 때문에, 다시 말해 주체의 존재 방식이 대상에 대한 주체 방식이기 때문에 대상 없는 주체를 생각할 수 없다고 대응할 것이다. 그러면서도 의식(주체)이 대상이 아닌 이상, 대상과 다른 자기 존재 방식을 유지한다고 할 것이다. 그러나 사르트르의 주체는 투명하고 대상은 모호함이 없는데, 메를로-퐁티 입장에서는 투명한 그런 주체도 없고 불투명함이 없는 그런 대상도 없다. 메를로-퐁티는 주체와 대상을 명백히 구별하는 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순수하고 투명한 주체를 생각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주체는 자신에 대해 투명하게 다 알지 못하며, 주체는 외적 대상과 얽혀 있기 때문에 사르트르처럼 인간의 순수한 자유는 불가능하다고 생각한다.

 


정치적 견해와 결별


 1940년대 사르트르와 메를로-퐁티는 자신들의 철학을 완성했지만, 또한 사회와 정치 문제에 큰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1940년 이차대전이 발발하고 프랑스는 나치에 점령되었기 때문이었다. 1941년 사르트르와 메를로-퐁티는 <사회주의와 자유>라는 비밀 저항 단체에 가입하여 나치에 저항했다. 1945년에는 현대라는 이름의 잡지를 그들은 공동 창간하였다. 이 잡지를 통해 사르트르와 메를로-퐁티는 문학, 사회, 정치적 문제 등을 다루었다. 이 시기에 사르트르와 메를로-퐁티의 우정은 가장 돈독하였다. 그 당시 메를로-퐁티가 정치문제에 대해 사르트르보다 더 적극적이었고 더 좌파적이었지만, 이것은 그들의 관계에 조금도 영향을 주지 못했다.  

그러나 1950년 한국전쟁 이후 메를로-퐁티와 사르트르의 관계는 예전 같지 않게 되었다. 메를로-퐁티는 한국전쟁 전까지 구소련의 스탈린 체제에 대해 대체로 긍정적인 입장이었다. 그러나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구소련의 스탈린 체제를 의심했다. 왜냐하면, 구소련이 북한의 남침을 막을 수 있었거나 적어도 전쟁을 방치하지 않도록 할 수 있었는데, 그러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메를로-퐁티는 스탈린 체제에 대해 비판하기 시작했고, 구소련도 미국처럼 제국주의적인 모습을 지닌다고 생각했다

이에 반해 사르트르는 메를로-퐁티만큼 스탈린 체제를 나쁘게 생각하지 않았다. 사르트르는 공산주의자는 아니었지만, 스탈린 체제를 옹호하는 프랑스 공산당 입장을 많이 수긍하였다. 오히려 사르트르는 구소련보다는 미국이 제국주의의 모습을 보인다고 비판했다. 미국의 군대와 미국의 사주를 받은 남한 군대의 도발에 북한이 함정에 빠져 남침했다고 사르트르는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처럼 한국전쟁과 관련하여 메를로-퐁티와 사르트르는 서로 다른 입장을 보였다. 메를로-퐁티가 한국전을 기점으로 덜 좌파적인 입장을 가지게 되었으나, 사르트르는 좌파의 입장을 많이 따랐고, 오히려 1952년 뒤클로(J. Duclos) 체포 사건을 계기로 사르트르는 급진 좌파가 되었다.

19525월 나토(NATO) 사령관이었던 아이젠하워(Eisenhower) 장군의 후임으로, 한국전쟁에서 미 8군 사령관으로 활약했던 리지웨이(Ridgway) 장군이 파리에 왔다. 미국이 한국전쟁에서 세균성 무기를 사용할 것을 공공연히 주장했기 때문에, 프랑스 공산당원들은 리지웨이를 혐오했고 리지웨이는 공산당원들의 공격 대상이 되었다. 리지웨이가 파리에 도착했을 때 공산당원들은 시위를 하였고, 파리 경찰은 시위대를 해산하고 검문하는 과정에서 국회의원이며 프랑스 공산당의 유력인사인 뒤클로(J. Duclos)를 체포하였다. 뒤클로의 차에서 총알이 있는 권총, 곤봉, 무선기, 통신용 비둘기 두 마리가 있다는 이유에서였다. 그러나 권총과 곤봉은 뒤클로의 운전수 것이었고, 무선기(Radio)는 라디오였고, 비둘기 두 마리는 통신용 비둘기도 아니고 죽어 있었다. 사르트르는 이런 사실을 듣고서 분노했고, “개종의 심정으로 혁명을 부르짖는 급진 좌파가 되었다. 그리고 반공산주의자는 개다라는 말까지 하게 된다.

이처럼 사르트르는 개종하고 메를로-퐁티는 스탈린 체제에 환멸을 느끼던 중에 이들을 갈라놓는 데 불붙인 사건이 일어났다. 1952년 피에르 나빌(P. Naville)이라는 사람이 현대지에 자본주의와 모순이라는 글을 썼는데, 메를로-퐁티는 이 글 앞에 비판적인 서문을 써 붙였다. 그러나 사르트르는 메를로-퐁티 동의 없이 메를로-퐁티의 비판적 서문을 삭제하였다. 메를로-퐁티는 이에 격노하여 현대에서 사임하였다. 이로써 두 사람의 우정에 금이 가고 그들은 결별하게 되었다.

사르트르와 메를로-퐁티는 결별한 이후 몇 차례 만났었다. 그러나 그들의 우정은 완전히 회복되지는 못하였고, 이렇게 그들의 관계가 회복되지 못한 채 1961년 갑자기 메를로-퐁티는 심장병으로 사망했다. 같은 해 현대특별 호에서 사르트르는 살아있는 메를로-퐁티라는 장문의 글로 회복되지 못한 그와의 관계를 회고해보면서 메를로-퐁티를 슬픈 마음으로 애도하였다.

  

  1. S. de Beauvoir, La force de l'â̂ge, Paris: Gallimard, 1960, pp. 141-142. [본문으로]
  2. J. P. Sartre, L'Etre et le Néant, coll. tel, Paris: Gallimard, 1986, pp. 353-4. [본문으로]
  3. M. Merleau-Ponty, Le visible et l'invisible, Paris: Gallimard, 1964, p. 78.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