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목미학

 

숙경


 

 

유목미학[각주:1]은 들뢰즈(Gilles Deleuze1925~1995)의 ‘유목론[각주:2]’을 이론적 바탕으로 하여 만들어진 새로운 미학 장르이다. 들뢰즈 철학에 있어서 유목론이 차지하는 비중은 자못 크다고 할 수 있겠는데, 유목론에는 ‘잠재성’, ‘다양체’, ‘리좀’과 같은 들뢰즈 철학의 핵심 개념들이 상징적으로 함축되어 있기 때문이다. 철학사적 맥락에서 살펴볼 때, 들뢰즈 철학의 위상은 서구 전통 사상의 중심 테마라 할 수 있는 ‘이데아의 모방’ 혹은 ‘형상(形相)의 재현’ 으로부터 가장 먼 곳에 자리하고 있다. 요컨대 들뢰즈 철학이 추구하는 바는 ‘재현’이 아닌 ‘창조’에 있는 것이다. 유목미학은 이와 같은 들뢰즈 철학을 바탕으로 하여 창조적 해석과 변용을 꾀하고자 만들어졌다. 바로 존재의 창조적 속성에 의한 다양한 변주가 유목미학의 중심 테마가 되는 것이다.



1. 유목론의 철학적 특성

 

유목론을 이끌어 가는 핵심 키워드 중의 하나는 ‘방목(放牧)’[각주:3]이다. 방목에는 앞서 언급한 잠재성, 리좀, 다양체의 원리들이 고스란히 함축되어 있다. 따라서 방목의 성격을 정확히 이해하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유목론의 핵심에 다가갈 수 있다.

일정한 장소에 머물러 살아가는 정착민과 달리 목축을 주업으로 삼아 삶을 영위하는 유목민은 가축을 방목하며 물과 풀을 찾아 이리저리 떠도는 생활습성을 지니고 있다. 정착민의 영토가 울타리나 소유지로 규정되어 있고, 그 규정된 장소에 사람들과 가축들이 분배된다면, 소유지도 울타리도 없는 유목민의 영토는 미리 규정되거나 제한되지 않은 열린 공간 안에서 오히려 사람과 가축에 의해 분배되고 결정된다. 이와 같은 유목 방식에는 몇 가지 중요한 철학적 의미가 함축되어 있다.

경계가 분명한 정착민의 소유지와 그 안에 배분되는 가축들의 움직임은 이미 짜여진 공간의 재현이라고 하는 구조적 의미가 깔려있는 반면, 경계 없는 유목민의 영토에서 방목되는 가축들은 무 규정의 공간에서 스스로 자신의 공간을 열어가고 창조해 간다고 하는 생성론의 의미가 함축되어 있다. 유목론은 곧 생성론의 상징에 다름 아닌 것이다. 들뢰즈는 그의 저서 『차이와 반복』에서 이와 같은 방목의 특성에 대해 ‘악마적’이라는 표현을 쓰고 있는데, 이는 방목이 ‘소유지’라고 하는 규정된 공간의 질서를 어지럽힘으로써, 재현이라고 하는 정착적 구조를 전복시키는 혼란을 야기하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유목론이 시사하는 바는 전통 형이상학의 존재론을 뒤엎는 사고의 획기적인 전환에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 전환에는 개체들이 미리 규정된 존재의 법칙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거꾸로 개체들이 스스로 존재를 생성하고 구축해간다고 하는 생성존재론의 의미가 깔려있다.

그러나 유목민의 영토가 유동적이라고 해서 무한대로 열린 공간은 아니라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유목이라고 하는 생활 형태는 물론 한 곳에 정주하지 않고 끊임없이 이동하는 습성을 가지나, 그렇다고 해서 되는대로 무작정 떠돌아다니는 것은 아니다. 정착민의 공간처럼 고정적인 것은 아니지만, 유목민들도 나름대로 정해진 영토 안에서 자연의 변화 등에 의해 관습화된 궤적을 따라 이동한다. 유목민이 정주민과 정확히 다른 점은 영토를 점유하고 상주하는 것이 아닌 일정 기간 머물렀던 지점으로부터 반드시 떠나야 한다는 것이다. 이 같은 사실은 유목론을 단순한 생성론의 범주에서 이탈시키는 결정적인 변수로 작용한다.

유목민의 영토가 일정 공간과 궤적에 한정되어 있다는 사실로부터 우리는 유목론이 구조주의적 입장을 완전히 버리지 않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한 편 그 공간이 고정불변의 것이 아니고 환경의 변화와 유목민의 이동에 따라 가변적이고 유동적이라는 점에서는 다시 구조주의를 넘어선다. 유목론에는 이른바 구조와 생성, 어느 것도 버리지 않고 함께 사유하고자 하는 의도가 깔려 있는데, 이 점이 바로 들뢰즈가 ‘포스트구조주의자’로 불리는 이유이기도 하다. 따라서 유목론에서는 장(field)과 운동이 함께 사유된다.

실상 장과 운동은 독립된 요소가 아니므로 따로 떼어 설명한다는 자체에 무리가 따르는 일일 것이다. 그런 점에 있어서, ‘다양체’와 ‘리좀’ 그리고 ‘잠재성’을 각각 분리하여 독립적으로 설명하는 것에도 무리가 없지 않을 것이나, 유목론의 철학적 분석을 위해 편의상 분리해서 설명하기로 한다.

 

(1) 다양체(multiplicity)

들뢰즈는 유목민의 운동이 '공간 이동'이 아닌 '제자리 운동'이라는 주장을 통해 '제자리에서 유목하기'라고 하는 독특한 발상을 전개한다. 일견 모순되어 보이는 이 같은 견해는 유목민의 생활터전이 건조한 스텝지역에 국한된다는 조건과 부합되어 설득력을 얻는다. 그들은 늘 이동하지만 실상 한 번도 자신의 영토를 벗어나 본 적이 없다. 설사 그들의 궤적 공간이 확대된다 해도 그것은 그들이 영토를 이탈한 것이 아니라 건조화 등 기후의 변화로 인해 영토가 확장된 결과일 뿐이다. 따라서 유목민은 늘 어딘가를 향해 떠나지만 정작 거주지를 버리고 떠나는 것은 정착민일지언정 유목민은 아니다. 정착민에게 있어서 이동이란 터전을 버리고 떠나는 것, 다시 말해 완전한 ‘이주(移住)’를 뜻하지만, 유목민에게 있어서 이동은 터전 안에서 쉬지 않고 순환하는 '제자리 운동'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유목민의 영토는 비록 한정되어 있을지라도 그들의 이동에 의해 수시로 그 위상이 변한다. 이로부터 하나의 중요한 상징적 의미가 포착되는데, 전통 존재론인 재현 방식은 공간적 차이, 양적 차이를 수반하지만, 유목론에서는 시간적 차이, 질적 차이가 존재의 근거가 되고 있다는 것이다. 본거지 자체가 바뀌는 정착민의 이동은 재현의 전통에서 개체의 차이가 곧 원본의 차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가 하면 이동에 따라 영토 자체의 위상이 수시로 바뀌는 유목론에서는 하나의 원본 안에 무수한 질적 차이가 존재함을 말해준다. 따라서 유목론에 있어서 존재란 재현으로 실현 불가능한 것이 되고 만다. 담과 도로에 의해 일정하게 구획된 공간에서 이루어지는 정착민의 행적이 규정된 '공간의 재현'이라고 한다면, 담도 도로도 없는 무 규정의 공간에서 이동과 정지의 여정을 병치해 가는 유목민의 행적은 스스로 도로와 거주지를 만들어 가는 '공간의 창조'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처럼 유목론에 있어서의 존재 방식은 선(先) 존재하는 '동일성의 재현'이 아닌 무수한 차이들(개체들)간의 접속과 배치로 만들어 가는 '동일성의 창조(혹은 구축)'라 하겠다. 그러나 이때의 동일성은 유일한 것도 고정불변 하는 것도 아니다. 유목민의 공간은 이동과 함께 옮겨지고 옮겨짐과 동시에 지워지는 미 규정된 경로에 의해서만 구분된다. 유목민에게 있어서 거주라는 개념도 정주민의 거주지처럼 부동의 공간이 아니라 그들의 궤적을 따라 끊임없이 이동한다. 그들이 비록 관습적인 궤적을 따라 이동한다 해도 모든 지점은 중계점으로만 존재하며 정주민의 공간처럼 영구히 점유되는 것이 아니다.

이처럼 유목민의 삶에 있어서 영토의 의미는 결코 고정적인 것도, 영구불변의 것도 아니다. 규정되고 다시 해체되기를 반복하는 유목민의 영토처럼 그렇게 가변적이고 유동적이고 복수적인 동일성을 들뢰즈는 ‘다양체’라고 부른다. 요컨대 ‘동일성이 다양체로 대체’되는 것이다. 여기서 보다 중요한 지점은 동일성이 선(先) 존재로서 모든 존재의 근원이라고 한다면, 다양체는 차이들, 개체들 간의 생성운동의 결과로 구축된 불완전한 창조물이라는 것이다. 이른바 ‘차이생성(differentiation)’이 동일성을 구축하는 것이다. 들뢰즈는 이와 같은 다양체의 생성 원리를 특정식물의 생식에 비유하여 설명하고 있는데 그것이 바로 ‘리좀’[각주:4]이다.

 

(2) 리좀(Rhizome)

리좀은 중심뿌리의 지배하에 폐쇄적이고 단일한 위계질서를 형성하는 수목형(樹木形) 나무뿌리와 달리, 중심뿌리가 제거된 채 줄기에서 직접 분기한 개개의 땅속줄기들이 횡적으로 직접 접속하는 열린 체계를 이룬다. 따라서 수목형(樹木形) 나무뿌리가 무수한 잔뿌리들의 차이를 모두 흡수하여 하나의 중심으로 환원시키는 반면, 비유기적으로 단절되고 이질적인 것들 간에 직접 접속하는 리좀은 접속되는 항들이 늘거나 줆에 따라 성질이 달라지는 가변적 체계를 형성하게 되는 것이다. 이와 같은 리좀의 원리는 한 지점에서 다른 지점으로 이동함에 따라 영토 자체의 위상이 수시로 바뀌는 유목의 속성을 고스란히 반영하고 있다. 따라서 관건은 ‘접속’에 있다. 접속만이 유일한 존재의 근거가 된다.

수목형 구조

  왼쪽 하단이 '리좀' (Attribution : Wackymacs at en.wikipedia.org)

  

 

어떻게 접속하고 해체되느냐에 따라 존재는 무수한 질적 차이를 수반한 다양체로 구축되기도 하고, 다시 해체되기도 한다. 따라서 리좀의 세계, 다양체의 세계에 있어서 ‘일점 근원의 신화나 궁극적으로 도달해야 할 목적지’[각주:5]는 그 의미를 상실하고 만다. 모든 존재는 시작과 끝이 아닌 ‘중간(中途)’에서 이루어지며 중간은 다름 아닌 접속이 이루어지는 곳이다. 접속은 그 자체로 운동이며 접속을 통해서만 생성과 변화가 일어난다. 그러나 시작과 끝은 운동이 멈춘 지점으로 그런 의미에서 존재와는 무관하다. 유목 또한 중간에서 이루어진다. 유목민에게 있어서 유목의 시작과 끝은 없다고 보아 무방할 것이다. 유목민의 행적에 정확한 출발지도, 뚜렷한 목적지도 없다. 따라서 유목민의 주거는 고정된 영토가 아닌 과정으로서의 ‘여정’이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여정 중에 어느 지점과 접속하고 배치를 이루면 그게 바로 거주지가 되는 것이다. 이렇게 여정의 의미가 강조 될 때 출발점과 도착점은 의미를 상실하고 유목은 오직 여정이 이루어지는 중간지대 - 중도(中途)가 실제적 의미로 부각 된다. 그렇다면 정해진 담도 도로도 없는 유목민의 공간에서 거주지와 궤적은 어떻게 결정되는가? 이를 철학적 의미로 담론화하면, 형상의 재현을 벗어난 존재의 발생은 어디로부터 오는가? 그 의문에 대한 답을 얻기 하기 위해서는 유목론의 구조적 특징을 함축하고 있는 잠재성으로 논의 장을 옮겨가야 한다.

 

(3) 잠재성(virtuality)

유목민들의 이동과 거주의 경로는 '기계(개체)[각주:6]-접속-배치(다양체)'의 리좀 라인을 이루며 유목의 대지 안에 잠재해 있다. 따라서 유목론은 ‘잠재성의 철학’, 보다 넓은 의미에서 ‘내재성의 철학’이라고 할 수 있다. 내재성의 철학이란 존재의 근원이 존재의 밖에 있지 않고, 존재 자체에 있음을 의미한다. 초월성이 초월적 존재의 근원을 현실에 투사하는 것이라면 내재성은 역으로 잠재된 존재가 현실로 구현되는 것이다. 그러나 무수히 많은 유목경로들이 대지에 잠재해 있다 해서 어떤 보물이 땅속에 매장되어 있다가 발굴되듯이 차례로 노출되는 성질의 것은 아니다. 그와 달리 유목공간의 형성은 잠재되어 있는 발생 가능한 리좀 계열들이 마치 ‘카드의 패를 던지듯이’ 또는 ‘바둑판 위의 어느 지점에 바둑알이 놓여지듯이’ 그렇게 접속과 동시에 발생한다. 카드 속에는 무수한 카드의 패가, 바둑판에는 무수한 바둑의 위상이 잠재해 있다가 어느 순간 현실성으로 부상하는 것이다.[각주:7]

잠재성의 성격은 들뢰즈 철학 개념의 하나인 ‘탈기관체(脫器官體:body without organs)’의 성격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탈기관체는 기관이 없는 몸이 아닌 기관이 유기적으로 조직되어 있지 않은 상태를 의미한다. 이처럼 몸의 기관들이 아직 조직화되어 있지 않은 탈기관체는 무수한 조직화의 계열이 잠재되어 있는 ‘알’과 같은 상태라고 할 수 있다. 여기서 우리는 잠재성의 존재가 ‘미 규정성’의 의미를 함축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잠재성이 현실화되기 위해서는 수많은 조건들과의 접속을 필요로 한다. 접속을 통해 잠재성은 비로소 현실화 되는 것이다.

이상으로 유목론을 크게 잠재성, 리좀, 다양체의 원리로 분석해보았으며, 유목미학은 그 원리들을 바탕으로 다양한 장르를 해석하고, 장르를 초월한 변용과 창작의 과정으로 확산된다. 그 중 한 예로 유목론의 주요 개념들을 중앙아시아 예술 분석을 위한 아우트라인에 간단히 적용해 보기로 한다.


 

2. 유목론의 창조적 해석과 변용 - 중앙아시아 미학

 

(1) 잠재성

중앙아시아라고 하는 공간은 지리적으로 유라시아 대륙의 한가운데 위치하고 있으며 예로부터 실크로드를 통한 동서교역의 중심지이자 온갖 문물이 교류하는 문명의 교차로 역할을 해왔다. 세계 각지의 종교와 문화, 예술 역시 실크로드를 통해 중아아시아로 흘러들어와 다양한 접속의 장을 형성하게 된다. 중앙아시아에는 불교와 이슬람교 뿐만 아니라 고대 페르시아에서 발생한 조로아스터교, 인도의 브라만교와 힌두교, 자이나교, 중국의 유교와 도교, 그 외에도 그리스 로마에서 흘러들어온 갖가지 신화와 종교 등 수많은 종교와 사상들이 혼재했다. 이 같은 특성상 고대 중앙아시아 지역에는 전체를 통일하는 중심 원리도, 하나의 규범을 세우는 오랜 전통도 가지고 있지 않았으며, 또한 모든 사상과 문화를 결속하는 거대한 유기적 체계도 갖추어져 있지 않았다. 중앙아시아는 바로 유라시아 각지에서 모여든 다양한 문화적 요소들이 미립자의 상태로 북적대는 곳, 아직 태어나지 않았지만 생명을 배태한 알처럼, 무수한 리좀 계열들과 다양체들을 가능태로 품고 있는 거대한 잠재성의 장인 것이다.

 

(2) 리좀

리좀은 그 자체로 시작도 끝도 아닌 ‘중간’만을 갖는다. 접속이 이루어지는 곳은 시작도 끝도 아닌 중간지대이기 때문이다. 중앙아시아는 접속과 배치가 이루어지는 ‘중간지대’이다. 그곳에 모여든 온갖 종류의 사상과 문화는 그 하나하나가 독립된 기계들로서, 다른 문화와 만나서 접속하는 양상에 따라 그 성질이 달라지는 가변적 체계를 이루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중앙아시아는 무수한 리좀의 장이라 해도 좋을 것이다. 이곳에서는 ‘원형’조차도 큰 의미를 갖지 못한다. 첫 근원지를 묻지도 않으며, 마침내 도달해야 할 목적지도 상정하지 않는다. 시작도 끝도, 중심도 주변도, 근원도 파생도 없이 오로지 만남과 접속이 이루어지는 곳, 따라서 중요한 것은 ‘원본’이 아니라 ‘접속’에 있다. 그렇게 시작과 끝이 없는 중간지대, 중앙아시아는 끊임없는 접속을 통해 무수한 ‘질적 차이-다양체’를 낳는 곳이다.


(3) 다양체

중앙아시아의 아프로디테 상. 중앙아시아로 오면서 어깨에 날개가 돋혔다.

중앙아시아에 흘러든 그리스의 신들은 더 이상 그리스 고유의 신들이 아니다. 그들은 먼 이국땅에 들어와 일단 안착하게 되면 그 지역의 다른 문화와 접속하여 다양한 질적 변화를 일으키기 때문이다. 승리의 여신 니케는 고대 페르시아 땅인 파르티아에 날아오면, 날개를 접고 지모신(地母神)의 성격으로 변하여 대지를 수호한다. 미의 여신 아프로디테 역시 파르티아와 간다라 지방을 통과하면서 그녀의 관능미는 질적 변화를 꾀해 생산을 관장하는 ‘풍요의 여신’으로 탈바꿈한다. 그런가 하면 그리스 최고신인 제우스는 몸소 중앙아시아의 간다라 지방까지 건너와서 붓다의 협시(挾侍)인 바즈라파니(금강역사)가 된다. 헤르메스와 디오뉘소스도 제우스를 따르는데 이를테면 그리스 신들이 단체로 불교에 귀의한 셈이 되는 것이다. 힘과 용맹의 상징인 헤라클레스의 경우는 보다 다양한 접속을 꾀하게 되는데, 그리스 땅을 떠나 가장 먼저 다다른 파르티아에서 그는 조로아스터교의 전승신(戰勝神) 베레트라그나와 접속하여 승리의 신으로 거듭난다. 그곳에서 많은 신도를 확보한 헤라클레스는 그 후 보다 동쪽으로 진입하여 박트리아(지금의 아프가니스탄) 지방에 이르면 불교와 접속하여 붓다의 협시가 되는데, 용맹하고 진취적인 헤라클레스는 이에 멈추지 않고 북방 실크로드를 따라 돈황 등지에 이르러 사찰과 불법을 수호하는 사천왕이 된다. 그리고 그곳에서 이번에는 역류한 중국 불교와 접속하여 인왕(仁王)상이 된다.

 

 

바즈라파니가 된 그리스 신들, 왼쪽부터 헤르메스, 디오뉘소스, 제우스, 사티로스(판) 바즈라파니(金剛力士)는 붓다의 수호상으로 손에 바즈라(금강저)를 들고 있다.


 

붓다의 협시가 된 헤라클레스. 어깨에는 사자 가죽을 걸치고 있다. 그리스 신화에서 헤라클레스는 맨손으로 사자를 때려잡았는데 그 후로 사자 가죽을 머리에 쓰거나 어깨에 걸치고 다녔다고 한다.

 

 

 

3. 유목미학이 나아갈 길


초월성의 철학에서 모든 존재는 ‘재현’의 원리를 따르는 반면 내재성의 철학, 잠재성의 철학에서 모든 존재는 창조의 원리를 따른다. 그렇다면 새삼 창조란 무엇인가? 굳이 '하늘 아래 새로울 것이 없다'라는 해묵은 격언을 들먹이지 않더라도 잠재성의 현실화, 그리고 리좀의 원리는 다음과 같이 말해주고 있다. 창조란 어느 먼 하늘에서 뚝 떨어지는 것도, 공허의 대지에서 불쑥 솟아오르는 것도 아니라는 것을...

무수한 다양체들이 북적되는 잠재성의 장 - 선험의 장에서 접속을 통해 배치를 이루는 것이 바로 창조가 된다. 그런 의미에서 창조의 실마리는 '접속'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기존에 있는 언어와 언어가 접속해서 새로운 사상을 수립하고, 기존에 있는 선과 선이 접속해서 새로운 예술을 탄생시킨다. 이 글의 시작에서 유목미학은 재현이 아닌 창조에 관한 이야기라고 서언(序言)했다. 이제 부언(附言)하건대 유목미학은 세상의 모든 ‘접속’에 관한 이야기다.

정주민에 있어서 삶의 궤적이 담과 도로에 의해 제한되어 있듯이 미학 역시 형식과 규범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는 오랜 재현의 전통 속에 있었다. 담과 도로가 없는 유목공간은 형식과 규범의 제약을 받지 않는다. 이 공간에서 더 이상 개념은 개념에만 머물지 않으며, 감각은 감각에만 머물지 않는다. 개념과 감각은 상호 간에 자유로이 넘나들며 접속하고, 접속을 통해 수많은 다양체들을 만들어간다. 유목미학이 나아갈 길은 세상 모든 개념들이 감각의 통로를 타고 지각으로 탄생하는 것, 그렇게 “개념을 에둘러 살아있는 노래, 외침이 되게 하는 것”이다.


  1. ‘유목미학’이라고 하는 용어는 필자에 의해 고안된 신조어(新造語)이며, 유목미학의 주제와 내용은 들뢰즈의 유목론을 바탕으로 하여 논의의 지평을 확대하고 창조적으로 변용하였다. [본문으로]
  2. 유목론(Nomadology)은 들뢰즈 사상에서 빼놓을 수 없는 핵심 이론 가운데 하나이다. 유목론에 관한 내용은 들뢰즈 가타리의 공저『천의 고원』(1980)에 집중적으로 등장하고 있지만 들뢰즈의 초기 저서인『차이와 반복』(1968),『의미의 논리』(1969)를 비롯하여 이후로 발표된 저서와 논문에서도 꾸준히 등장하고 있다. [본문으로]
  3. 호메로스 시대에는 방목장의 울타리나 소유지 개념이 없었다고 한다. 당시 그 사회에서는 정해진 땅을 가축들에게 분배하는 것이 아니라 거꾸로 가축들을 숲이나 산등성이 같이 한정되지 않은 공간 여기저기에 풀어놓아 스스로 공간을 점유해 가게 했다는 것이다. 따라서 방목의 장소에는 명확한 경계가 없었는데, ‘경계 없는 공간’이라는 뜻의 ‘노마드’도 이로부터 성립한다. 유목민을 뜻하는 노마드(nomad)의 어원은 그리스어 노모스(nomos)에서 유래된 것으로 노모스는 관습이나 법 이외에 ‘경계 없는 공간’이라는 의미도 가진다. [본문으로]
  4. 리좀은 땅 밑 줄기(또는 땅 속 줄기)를 이르는 말로 들뢰즈 가타리의『천의 고원』에서 수목형(樹木形)에 대비되는 개념으로 함께 등장한다. 수목형과 리좀형은 각각 전통존재론과 차이생성론을 상징한다. 모든 존재가 하나의 중심으로 환원되는 전통 형이상학의 초월적 사유는 모든 뿌리들이 하나의 중심뿌리로 귀착되는, 다시 말해 하나의 뿌리를 중심으로 모든 곁뿌리들이 뻗어가는 수목형 사유체계이다. 그러므로 모든 존재의 근원을 향해 거슬러 올라 이데아, 신, 주체와 같은 존재의 제1원인을 찾아내고 그것을 통해 모든 존재를 설명하는 초월성의 사유체계는 다름 아닌 수목형 사유체계가 되는 것이다. 한 편 중심이 제거된 체계 속에서 발생과 변형을 존재의 특징으로 하는 차이생성론은 중심뿌리 없이 줄기자체가 분기하여 각각 뿌리역할을 하는 리좀형 사유체계에 비유할 수 있을 것이다. [본문으로]
  5. 이 문구는 플라톤의 이데아론에서 헤겔의 변증법에 이르기까지 전통 형이상학의 모든 사유를 함축하는 의미로 많이 쓰인다. [본문으로]
  6. 들뢰즈는 개체(an individual)를 기계(machine)로 표현하고 있는데, 이는 개체 자체보다는 ‘접속’에 비중을 두기 위한 의도로 해석할 수 있다. 존재의 비중이 어떤 보편적 존재나 혹은 개체 하나 하나에 있는 것이 아니라, 개체들 간의 접속에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그것은 기계를 복잡한 기계(complex machine)가 아닌 나사와 같은 단순 부품으로서의 기계(simple machine)로 설명한데서도 확인 할 수 있다. 하나의 부품은 다른 부품과 연결 접속됨으로써만 존재의 성질이 부여된다. [본문으로]
  7. 잠재성의 분화(현실화)에 관해서는 이정우의 『사건의 철학』(그린비, 2011) 1부 5강을 참조할 것.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