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뢰즈/가타리의 정신분석 비판 (上)

 

한정헌 (연세대 겸임교수)

 

최근 국내에 번역, 소개된 정신분석 관련 저작 중에서 유독 눈길이 가는 제목이 있다. 미셸 옹프레의 우상의 추락(원제: 우상의 황혼 Le Crépuscule d'une idole, 부제: 프로이트의 날조 L'affabulation freudienne, 2010)이다. 니체의 우상의 황혼(Götzen-Dämmerung, 1889)을 책 제목으로 가져다 사용하고 있는 이 비판적 평전은 프로이트가 크게 의존하고 있는 (하지만 마치 그렇지 않은 것처럼 시치미를 뚝 떼고 있는) 여러 철학자의 흔적들을 추적함과 동시에, 그가 정립한 수많은 이론이 철저히 그의 전기적 삶과 연관된 조작과 날조의 산물임을 폭로함으로써 니체, 마르크스와 나란히 거론되어온 거대한 우상의 황혼을 선언하고 있다. 이런 점에서 저자의 프로이트에 대한 입장은 한마디로 안티프로이트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 저작을 대하면서 많은 이들의 머릿속에 자연스럽게 연상될 책 한 권이 있다. 바로 들뢰즈/가타리의 안티오이디푸스(L'Anti-OEdipe, 1972)이다. 아마도 니체주의적 관점에서 프로이트/라캉의 정신분석을 근본적으로 비판한 책이기 때문일 것이다. 들뢰즈/가타리의 안티오이디푸스는 니체의안티크리스트(Der Antichrist, 1888)를 염두에 두고 지은 책 제목인데, 이들이 말하는 오이디푸스는 오늘날의 그리스도교, 새로운 초월적 형이상학으로서의 정신분석을 가리킨다. 즉 이들은 오이디푸스가 플라톤주의와 그것의 대중적 판본인 그리스도교의 형이상학을 반복하고 있다고 보고, 남근을 배후세계 혹은 이데아/형상으로 숭배하는 현대판 사제로서의 정신분석을 통렬히 비판하고 있다.

하지만 여기서 주의할 점은, 이들이 반대하는 것이 오이디푸스로 표상되는 정신분석이지 프로이트 자체는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안티오이디푸스안티프로이트와 동일시해서는 곤란하다. 그렇게 되면 이들이 주장하는 분열분석이나 욕망의 개념도 이해할 수 없는 것이 되고 말 것이다. 이들이 주장하는 욕망은 사실 초기의 프로이트가 찾아낸 개념이기 때문이다.

 

 

프로이트와 기계적 욕망

 

물론 이때의 프로이트는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꿈의 해석(Die Traumdeutung, 1900) 이후의 프로이트가 아니라 주로 과학적 심리학 초고(Entwurf einer Psychologie)를 쓰던 당시, 신경생리학자로서의 프로이트를 가리킨다(이하 과학적 심리학 초고초고로 약하여 표기함). 이 시기에 그는 생물학적이고 해부학적인 측면에 관심을 기울이면서, 뉴런과 뉴런 사이의 물리학적이고 경제학적인 힘=에너지의 관계에서 인간의 무의식에 접근했다. 그러나 이후에 그는 이러한 관점을 계속 밀고 나가지 못하고 해석학적 작업으로 선회한다. 이렇게 되면 인간의 무의식이 어떤 의미, 진실이나 진리를 은폐하고 있다는 사실을 전제하게 된다. 따라서 이제 정신분석가는 흡사 그 배후의 궁극적 의미를 읽는 해석학자와 같은 시선으로 환자를 살펴보게 되었으며, 이런 점에서 정신분석은 (배후의) 진리를 찾는 형이상학과 동일한 기반을 가지게 되었다.

 

     

 

 

들뢰즈/가타리의 입장에서 볼 때 이것은 초고를 쓸 당시의 (-인간적이고 기계적인) 리비도 중심의 심리학에서 리비도의 흐름을 자아의 통제 아래에 두는 자아심리학으로의 (인간주의적이고 남근중심적인) 후퇴를 의미한다. 미리 말해두자면 안티오이디푸스에서 들뢰즈/가타리가 말하는 욕망(désir)(스피노자의 코나투스conatus, 니체의 힘에의 의지Wille zur Macht, 베르그손의 생명의 약동élan vital 등과 함께) 프로이트가 초고에서 논하는 무의식 혹은 리비도의 흐름과 관련된다. 이 책에서 프로이트는 인간의 욕망에 대해 생리학적 입장에서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그것들[정동Affekt과 욕망]은 둘 다 ψ[뉴런]에서의 양Qἠ적인 긴장의 증가--정동의 경우는 갑작스러운 해방에 의해, 그리고 욕망의 경우는 가중에 의해 야기된다.”[각주:1] 여기서 양은 생리학적으로는 뉴런들 사이를 자유롭게 흐르고 이동하는 힘=에너지의 내포량=강도량(des quantités intensives)을 뜻한다. 프로이트가 자주 사용하는 자극이라는 말도 에너지가 뉴런에 집중=투여=투자되어(besetzt=invested) (뉴런을) 흥분시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이 은 나중에 성충동의 에너지로서의 리비도’(libido)로 불리게 된다. 리비도가 갈망혹은 욕망을 가리키는 라틴어라는 점에서 알 수 있듯 이것은 프로이트가 생각한 원초적인 욕망의 개념이라 할 수 있다.[각주:2] 따라서 이 당시의 프로이트에게 있어서는 욕망=(에너지)==리비도=강도량의 등식이 성립했다고 볼 수 있다. 바꿔 말하면 그는 욕망을 표상의 관점이 아니라 힘들의 생산의 관점에서 접근했던 것이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들뢰즈/가타리가 안티오이디푸스에서 주장하는 욕망의 원형이 된다.

 

정신분석의 위대한 발견은 욕망하는 생산, 무의식의 생산들의 그것이었다.[각주:3]

 

[] 프로이트는 욕망의 주관적 본성 혹은 추상적 본질을 발견하고 있다. [] 프로이트는 단적으로 욕망 자체를 최초로 찾아낸 사람이다. (AO, 441)

 

주목할 만한 것은 (초기의) 프로이트가 초고에서 인간 무의식의 작동을 철저히 리비도의 기계적 작동, 즉 강도량의 형성, 이동, 방출로 설명하고 있다는 점이다. 다시 말해 신경생리학자로서의 프로이트는 욕망을 생리학적 관점에서 리비도=강도량의 형성과 흐름으로 이해했다. 그러니까 리비도의 흐름은 기본적으로 뉴런의 양적인 흐름으로서 무제약적이고 공격적이며 비-인간적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속성을 프로이트는 스스로 기계적 원리라고 표현했으며[각주:4], 들뢰즈/가타리는 이를 이어받아 욕망=리비도의 성격을 기계적’(machinique)이라는 말로 집약한다. 물론 프로이트가 본래 사용한 기계적’(mechanisch)이라는 용어는 리비도의 양적인 성격을 강조하기 위한 것이란 점에서 기계론적’(mécanique)이라는 말과 크게 다르지는 않다. 그러나 이것은 생물학적 원리라 할 수 있는 유기체적이고 자아 중심적인 항상성의 원리에 제한되지 않고 오히려 그것을 위협하고 넘어서고자 한다는 점에서 비-인간적이고 유물론적이며 외부적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들뢰즈/가타리는 이러한 욕망 혹은 리비도의 기계적 원리를 강조하기 위해 기존의mécanique=mechanical이라는 말 대신에 사전에 없는 machinique=machinic이라는 말을 만들어 사용한다. 이들의 책에서 기계적 욕망’(désir machinique)이라는 말이 마치 한 단어처럼 사용되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 기계적 욕망은 자아나 주체와 무관하게 철저히 자유롭고 비인칭적인=-인간적인 리비도의 흐름이라 할 수 있다. 이런 점에서 프로이트는 리비도의 저장소를 비인칭적인 그것’(das Es=le ça=id)이라고 이름 붙였던 것이다. ‘그것은 영미권에서 흔히 이드’(id)로 번역되어 널리 쓰이고 있지만, 본래 게오르크 그로데크(Georg Groddeck)로부터 빌려온 것으로, 인간 안의 비-인간적인 것을 뜻하는 니체적 개념이다(자아와 이드, 361-362).

라플랑슈/퐁탈리스는 프로이트가 그것이라는 비인칭적 개념에 끌린 이유를 그로데크의 수동적 자아론에서 찾는다.[각주:5]내가 말하고 있는 사람이 바로 게오르크 그로데크인데, 우리가 자아라고 부르는 것은 본질적으로 우리의 삶 속에서 수동적으로 행동하고, 그의 표현대로, 우리는 알지 못하고 통제할 수 없는 어떤 힘에 의해서 살게 된다고 지칠 줄 모르게 주장하는 사람이다.”(자아와 이드, 361-362) 즉 욕망의 주체는 ’, ‘’, 혹은 /가 아니라 미지의 그것이라는 이야기다. 내 안에 있으면서 에게 귀속되지도 제어되지도 않는 이 괴물은 단지 기계적 원리에 따라 욕망을 생산하고 표상들을 자유롭게 실어 나른다.

이와 같이 프로이트의 그것은 상당 부분 니체로부터 가져온 개념이며 니체와 프로이트의 접속에 의해 탄생한 소위 비-인간적이고 초-인간적인 욕망의 개념화라 할 수 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프로이트가 니체주의자라는 말은 아니지만, 프로이트가 적어도 힘/에너지에 대해 니체와 공통적인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는 점만큼은 부정할 수 없다.[각주:6] 그리고 들뢰즈/가타리는 니체를 사이에 두고 프로이트와 접속함으로써 프로이트 사상의 내부의 외부, 기계적 욕망의 개념을 발전시킨 것이다.

 

 

프로이트/라캉의 결여로서의 욕망

 

그러나 프로이트는 탈인간적인 욕망 자체(즉자적 욕망)의 개념에서 곧바로 (들뢰즈가 개념적 차이라고 표현하는 것과 같이) 개념적 욕망 혹은 표상적 욕망으로 후퇴하고 만다. 뛰어난 신경 생리학자였던 프로이트는 욕망 자체, 즉 비개체적이고 비-인간적이며 분자적인(분열증적인) 기계적 욕망을 철저히 생물학적 개체와 심리적 자아라는 개별성(individuality) 속으로 가져가 이해했다. “그러나 오이디푸스와 더불어, [정신분석의 욕망하는 생산의] 발견은 하나의 새로운 관념에 의하여 금방 가려진다. [] 무의식의 생산단위들 대신에 표상이 들어서고 생산적 무의식의 자리에는 자기를 표현하는 일밖에 할 줄 모르는 무의식(신화, 비극, ……)이 들어섰다.”(AO, 45-46) 다시 말해 욕망의 주체를 그것으로부터 자아로 가져오게 되면서 욕망은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정신분석에서의 대표적 표상들인 남근, 오이디푸스, 가족 삼각형 등에 의해 억압되어 부정적이고 반동적으로 형성된 어두운 힘으로 존재하게 되었다. 프로이트가 최초로 찾아낸 기계적 욕망은 이제 의식적 자아 혹은 표상의 주체에 의해 물신적으로 전도되어 욕망의 표상이 아니라 표상의 욕망으로 환원된 것이다. “무의식은 참된 자기, 즉 하나의 공장, 하나의 작업장이기를 그치고 하나의 극장, 즉 무대와 연출이 되고 만다. 그것도 프로이트의 시대에 있었던 것 같은 아방가르드의 극장(베데킨트 Wedekind)이 아니라 고전적 극장, 표상의 고전적 질서가 되고 만다.”(AO, 88)

 

 

자크 라캉은 프로이트의 언어적 혹은 해석학적 전회를 이룬 꿈의 해석(1900)을 비롯해 일상생활의 정신병리학(1901), 농담과 무의식의 관계(1905)등을 중심으로 프로이트로의 복귀를 주창한다. 이 저작들에서 프로이트는 주로 신경생리학이나 리비도 경제학적 관점으로부터 언어적 혹은 해석학적 관점으로의 커다란 전환을 보이고 있다. 망각, 말실수, 농담 등 언어적인 것을 통해 무의식의 은폐된 진실을 찾아내고자 한 프로이트의 이 작업을 라캉은 정신분석의 나아갈 길이라고 본 것이다. 이에 따라 라캉은 프로이트의 무의식을 리비도 경제학이나 에네르기학적 관점에서 보지 않고 철저히 언어학적 관점에서 해석한다. 이에 대한 그의 입장은 무의식은 언어처럼 구조화되어있다라는 말 속에 집약되어 있다. 이런 점에서 그는 프로이트의 그것에 상응하는 실재계나 자아에 상응하는 상상계보다는 초자아에 상응하는 상징계에 우선성을 둠으로써 프로이트를 언어학적으로 재해석하고, 그것을 이른바 프로이트로 돌아가는가장 바람직한 길이라고 보았다.

라캉은 우선 프로이트에게 드리워져 있는 생물학적(해부학적)이고 실재론(본질론)적이며 목적론적인 성격을 중성화하고 프로이트의 남성적인 리비도를 계승하되 소쉬르의 언어학을 (기호중심에서) 기표중심으로 재해석하여 그것을 상징계에 관련시킴으로써 인간의 자연적이고 본원적인 욕구(besoin=need)의 위상을 (상징계에 비해) 축소시켰다. 다시 말해 생물학적 인간이 언어를 중심으로 한 상징계에 첫발을 내딛는 순간을 사실상 논의의 출발점으로 설정하여 욕구보다는 욕망(désir)의 문제에, 즉 주체화의 문제에 천착했다. 인간은 자신의 욕구를 언어적/사회적인 요구(demande)로 번역함으로써 거세된 주체=균열된 주체()로 욕망(의 그래프) 앞에 서게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주지하는 바와 같이 욕망=욕구-요구라는 등식이 성립하게 된다.

 

욕망은 만족을 향한 갈망도, 사랑을 향한 요구도 아니다. 그것은 욕구로부터 요구를 뺀 차이, 즉 그것들[욕구와 요구]의 분열(Spaltung)이다.[각주:7]

 

욕망은 요구가 욕구로부터 분열되는 가장자리 속에서 형성된다.[각주:8]    

 

이때 라캉이 말하는 욕망은 욕구가 언어에 의해 매개되면서 그중 일부가 빠져나간 찌꺼기 혹은 과잉에 해당한다. 이런 점에서 욕망은 결국 충족되지 못한 욕구라 할 수 있다. 가령 유아가 울면서 자신의 욕구를 표출할 때, 부모는 그 울음의 의미를 (언어적으로) 해석함으로써 욕구를 요구로 환원한다. 이것은 성인이 되어서도 마찬가지다. 아무리 언어적 요구로 결여된 자리를 보충하려 해도 그러면 그럴수록 이리저리 옮겨 다니는 빈칸을 채울 수 없다. 즉 욕망은 본능적 욕구에서 언어적 요구를 뺀 나머지, 혹은 실재가 상징을 통과하면서 밑으로 가라앉은 잔여물을 가리킨다.[각주:9] 따라서 욕망은 언제나 (충족되지 못한 욕구에 대해) 대체 가능한 표상들의 가면을 쓰고 나타나 움직이는 빈칸을 채우며 작동하게 된다. 이 빈칸은 욕망의 대상으로서의 소타자로 나타나며 (어떤 선험적으로 주어진 주체가 소타자와 마주하는 그런 방식이 아니라) 이것에 의해서 주체가 구성된다. 그래서 라캉의 L도식에 따르면, 주체(S=sujet)가 타자(A=autre)를 만나는 방식은 언제나 자아(a')와 소타자 a의 상상적 관계(상상축)에 의해 매개되는데, 이런 점에서 우리가 생각하는 전통적인 선험적 주체는 어디에도 없다. 오히려 주체는 (언어가 기원하는 장소로서의) 대타자(A), (타자가 보여지는 상으로서의) 소타자(a'), 그리고 (소타자와의 관계 속에서 라고 상상되는) 자아(a)에 의해 구성된다. 즉 주체 S는 선험적으로 고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A, a, a' 에 의해 구성 및 결정된다는 것이다.[각주:10]

 

 

 

요컨대 라캉이 말하는 욕망은 언어에 의해 억압된 무의식적인 것이며, 현실계에서 환상대상(objet=a)의 모습으로 부단히 환유된다. 다시 말해 아버지의 이름(=언어=상징계)에 의해 균열된 주체는 그 결여를 환상적인 대상 a를 통해 채우고 싶어 하며, 결코 채울 수 없는 영원한 갈증이 시작되는 것이다. 유명한 라캉의 환상공식(d a)은 이것을 설명하기 위함이다. 환상공식에서 욕망(d=désir)은 균열된 주체()가 완전한 충족에 이르기 위해 환상대상 a를 끊임없이 추구하는 과정을 보여준다. , 욕망은 균열된 주체가 (그것만 취하면 완전한 충족에 이를 수 있을 거라 믿는) 환상대상 a와 마주 서면서 생성된다. 물론 주체는 a와의 거리를 결코 좁힐 수 없다. a는 고정된 대상이 아니므로 부단히 다른 대상으로 바뀐다. 다시 말해 욕망은 결코 완전히 충족될 수 없다는 것이다.

 

 

부재 위에 기초한 형이상학

 

이미 살펴본 것처럼 프로이트는 초기에 신경생리학적 관점에서 인간의 무의식적 작동방식, 인간 안의 비인간인 그것의 욕망, 리비도의 기계적 생산원리를 최초로 발견했으나, 그것을 계속 밀고 나가지 못하고 남근이라는 초월적 기표를 중심으로 조직화하였다. 이로 인해 욕망은, 기계적이고 생산적(=생산하는)이며 분자적인 욕망의 흐름으로서가 아니라 오이디푸스 삼각형의 은밀하고 협소한 범주 안으로 제한된 의미를 띠게 된다. 여기서 남근의 화신인 아버지는 거세위협을 거세콤플렉스로 현실화시키는 초월적 존재로 작용하며 어린아이의 경우 어머니를 포기하고 아버지와의 동일시를 통해 주체로 자리매김하게 된다(물론 아버지 역시 실제로 남근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가지고 있다고 가정되는 존재이다). 이때 아버지는 살아있는 현실대상으로서의 아버지라기보다는 상징계의 상징으로서 아버지의 이름(nom-du-père)=아버지의 금지(non-du-père)라 할 수 있다. 프로이트/라캉에게 아버지는 살아있는 생물학적 아버지가 아니라 죽은 아버지, 초월적인 존재로서 금지를 명하는 자, (실재하지 않기 때문에) 이름=금지(nom=non)로만 존재하는 (죄의식의 내면화로서의) 초자아, 혹은 남근적 기표의 초월적 심급으로서 대타자(Autre)를 뜻한다.

들뢰즈/가타리는 정신분석이 이런 죽은 아버지, 아버지의 이름, 초월적 남근기표라는 부재에 근거하고 있다는 점을 들어 비판한다. “여기서는 오이디푸스의 제국주의가 부재 위에 기초를 두고 있다.”(AO, 94) 이들이 말하는 부재(absence)란 현실적 부재를 의미하는 것으로, 이는 어떤 근본적인 배후를 가리킨다. 다시 말해 현실적으로 부재하지만, 그 이면/배후에 자리하는 어떤 아르케’=원형이 바로 남근이라는 것이다. 여기까지만 기술해도 우리는 들뢰즈/가타리가 어째서 정신분석을 형이상학적이라고 평했는지 어렵지 않게 이해할 수 있다. 왜냐하면, 서구 형이상학의 본질은 지금 이 현상적 세계에 없는 어떤 참된 세계, 진정한 세계, 진리를 전제하는 데 있으며, 그 대신에 이 현상세계를 가상으로 여기기 때문이다.

요컨대 정신분석은 인간을 남근’(phallus)(남근을 가지고 있다고 가정되는) ‘아버지’(의 이름)라는 중심기표를 통해 종합하고자 한다는 점에서, 바꿔 말해 부재하는 남근과 죽은 아버지라는 선험적 가상’(transcendental illusion)을 통해 설명하려 한다는 점에서 일종의 형이상학이라 할 수 있다. 다시 말해 우리가 알 수 없고 볼 수 없고 만질 수 없는 배후세계에 남근 혹은 아버지의 이름이 작동하고 있다는 식의 논변은 그 자체로 형이상학적인 것이다.

 

이 글에서 이어지는 [들뢰즈/가타리의 정신분석 비판 (下)] 편이 곧 게재될 예정입니다.

 

 

 

 

 

  1. 지그문트 프로이트, 임진수 옮김, 「과학적 심리학 초고」, 『정신분석의 탄생』(서울: 열린책들, 2005), 249-250. [본문으로]
  2. 장 라플랑슈/장 베르트랑 퐁탈리스, 임진수 옮김, 『정신분석사전』(서울: 열린책들, 2005), 122. [본문으로]
  3. 질 들뢰즈/펠릭스 가타리, 최명관 옮김, 『앙띠 오이디푸스』(서울: 민음사, 1994), 45. 이후 AO로 약하여 쪽수와 함께 본문에 표기 [본문으로]
  4. 지그문트 프로이트, 윤희기/박찬부 옮김, 「자아와 이드」, 『정신분석학의 근본개념』(서울: 열린책들, 2003), 250. 이후 「자아와 이드」로 약하여 쪽수와 함께 본문에 표기 [본문으로]
  5. 장 라플랑슈/장 베르트랑 퐁탈리스, 『정신분석사전』, 75. [본문으로]
  6. 질 들뢰즈, 이경신 옮김, 『니체와 철학』(서울: 민음사, 2001), 206-207. [본문으로]
  7. Jacques Lacan, Ecrits (paris: Éditions du Seuil, 1966), 691. [본문으로]
  8. 위의 책, 814. [본문으로]
  9. 프로이트나 라캉은 욕망이 본능이나 욕구로부터 파생되어 나온다고 보는 데 반해, 들뢰즈/가타리는 오히려 욕구가 욕망에 의해 파생되는 것으로 본다. 다시 말해 욕구는 인간이나 사회의 욕망에 의해 만들어진다는 것이다. AO, 49. [본문으로]
  10. Jacques Lacan, Ecrits, 53-54.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