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뢰즈/가타리의 정신분석 비판 (下)

 

한정헌 (연세대 겸임교수)

 

이글은 앞서 게재된 [들뢰즈/가타리의 정신분석 비판 ()]편에서 이어지는 내용입니다

 

 

라캉의 부성은유

 

라캉은 프로이트보다 한 걸음 더 나아가 남근기표의 초월성과 부재의 원리를 자신의 부성은유의 출발점으로 삼고 있다. 그가 주장하는 부성은유는 남근기표로서의 아버지와 오이디푸스적 관계를 잘 보여준다.

 

 

  

우선 어린아이는 어머니의 욕망에 전적으로 의존해 있다. 그리고 어머니와의 이자적인 상상적 관계에서 처음엔 자신이 어머니의 욕망이 될 수 있다고 믿는다. 여기서 어머니의 욕망은 곧 남근(phallus)이다. 다시 말해 어린아이는 어머니가 욕망하는 것이 바로 남근이라고 상상하며, 또한 그의 상상 속에서 어머니가 욕망하고 있다고 믿는 남근이 될 수 있다고 확신한다. 하지만 아버지의 개입으로 한동안 아버지의 기표와 경쟁하다가(오이디푸스 콤플렉스) 자신이 결코 그의 상대가 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어머니의 욕망이 되고자 하는 상상적 합일의 의지를 버리게 된다(거세콤플렉스). 즉 어린아이는 이제까지 어머니의 욕망을 욕망했지만, 아버지의 개입으로 인해 어머니의 욕망이 사실은 자신이 아니라 아버지(의 남근)이며 어머니의 욕망이 더 큰 권위로서 등장한 아버지의 이름에 의존적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어머니의 상상적 남근이 되기를 포기하고) 아버지의 이름을 받아들이게 된다.

 

이제 어머니의 욕망의 자리는 더 이상 자신이 채울 수 없으므로 빈칸=결여로서 남게 된다. 대신에 아버지의 이름이라는 기표가 어머니의 욕망을 대체하며 들어오게 된다. 요컨대 어린아이는 어머니의 상상적 남근이 되려는 오이디푸스적 욕망을 포기하고, 즉 그 욕망을 억압하고, 대신에 아버지의 이름을 받아들인다. 또한, 어머니의 욕망을 대체한 아버지의 이름의 기표가 무의식으로 억압되면서 그것을 대신하는 또 다른 대체표상들=은유적 기표들이 환유적 연쇄를 이루게 된다. 원초적 욕망인 어머니의 욕망은 아버지의 이름으로 대체되면서 억압되어 무의식적 욕망의 원형이 되고, 대신 그 빈자리에 아버지의 이름이 들어오면서(=어린아이가 받아들이면서) 이후에 대체되는 기표들은 모두 남근적이고 아버지적인 욕망의 기표들이 된다. 쉽게 말하면 인간의 무의식 속에는 어머니의 욕망을 대리하는 아버지적인 기표가 있으며 이것이 억압되어 다른 기표들로 대체되면서 기표들의 환유적 연쇄/사슬을 형성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정신분석의 과업은 이러한 억압된 기표들의 연쇄를 찾아서 드러냄으로써 환자의 증상의 원인을 밝히는 것이다.

 

요컨대 최초의 욕망은 무의식으로 억압되고 아버지의 기표로 대체되어 영원한 빈 칸으로 남게 되며 어린아이는 아버지의 기표를 받아들임으로써 거세된 주체=욕망하는 주체=의미있는 존재로서 상징계에 진입하게 된다. 즉 어린아이는 말을 시작함과 동시에 거세된 주체=균열된 주체()로서 이를테면 어떤 상징적 할례를 받게 되는 셈이다. 이런 점에서 (전통적 선험철학에서와 같이) 주체가 먼저 있어서 어떤 것을 욕망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욕망이 주체를 구성하는 것이며, 이 욕망은 어머니의 욕망을 대체한 아버지의 이름이라는 남근기표로서 (이것이 무의식 속에 억압되어 있기 때문에) 의미화되지 못하고 (따라서 억압되어 있기 때문에) 다른 기표들로 대체되어 기표들의 환유적 연쇄가 이어진다.

 

기표들의 환유적 연쇄과정에서 의미화가 이뤄지는 순간은 이 과정의 마지막 지점에 이르러서다. 연쇄가 끝나는 지점에서의 마지막 기표가 최초의 기표로 소급해 올라가 그 위에 얹어질 때 의미가 사후적으로발생하는 것이다(S/s). 마찬가지로 정신분석에서 찾는 기표들의 연쇄는 아버지의 이름이라는 기표가 의미화되지 못하여 굴절되고 증식된 환유적 사슬이라 할 수 있다. 정신분석은 환자의 증상이라는 감성적 기표들을 누빔점 혹은 고정점(point de capiton)으로 정박시켜 의미를 부여한다. 여기서 의미화는 결국 무의식 속의 주체를 찾아내는 일이라 할 수 있다. 즉 누빔점은 증상들=기표들의 무의식적 주체를 찾아 소급시키는 기능을 수행한다. 이것은 결국 어떤 증상이건 간에 기표들의 흐름을 역으로 거슬러 올라가 아버지의 이름이라는 남근기표를 찾는 행위에 다름 아니다. 모든 기표가 아버지의 이름의 굴절된 형태를 띠기 때문이다.

 

 

욕망=죄악의 금욕주의

 

 

   그런데 흥미로운 사실은 정신분석이 신경증, 도착증, 정신병 중에서 주로 신경증을 치료 대상으로 삼고 있다는 점이다. 다시 말해 도착증과 정신병은 정신분석에서 주로 다룰 수 있는 영역이 아니라 할 수 있는데, 정신분석은 그 이유를 오이디푸스 과정에서 찾는다. 그것은 아버지의 이름을 수용하는 과정에서 어떤 문제가 있었거나 아예 받아들이지 않았기 때문에, 즉 주체화의 과정에 어떤 문제가 있었기 때문에 분석가와 환자의 분석관계가 성립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특히 정신분열증 환자의 경우에는 이들의 무의식 속에 아예 아버지의 이름이라는 기표가 기입되어 있지 않으므로 주체가 성립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즉 오이디푸스로부터 비껴가는 증상은 정신분석의 영역이 되기 어렵다. 이에 반해 신경증자는 정신분석가가 부여하는 남근기표를 통해 십중팔구 치료효과를 경험한다. 그래서 이것은 마치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의 일반적이고 보편적인 실체성이 마치 실제로 증명되기라도 한 것처럼 여겨지기도 한다.

 

그러나 들뢰즈/가타리가 보기에 신경증자를 낫게 하는 요인은 분석가의 정확한 오이디푸스 진단에 있다기보다는 양자의 전이관계에 있다. 이는 신경증자의 증상이 비록 오이디푸스적이지 않다 하더라도 분석가와 환자의 수직적인 전이관계에서 분석가가 부여한 기표는 곧 진리가 된다는 말이다. 전이는 일종의 감정의 재현이다. 환자가 자신의 억압된 무의식을 자신의 앞에 있는 분석가에게 투영하여 그 상황의 감정을 재현하는 것이다. 이때 분석가는 환자에게 그의 부모가 될 수도 있고 사랑하는 대상이나 분노의 대상이 될 수도 있다. 말하자면 환자는 급속히 분석가와의 사적인 감정에 돌입하여 그에게 애정을 보이거나 분노하고 저항하는 등 지극히 의존적 상태가 된다(프로이트는 환자의 치료를 위해서는 이런 재현적 전이관계가 필수적인 것이라 보았다).

 

따라서 전이관계는 환자의 실제 증상과 상관없이 어떤 기표를 주든지 의미화를 불러일으킨다. 다시 말해 무의식의 억압 때문에 분석가를 찾아온 신경증자가 바라는 것은 또 다른 억압(의 기표)일 뿐이다(신경증자는 자신의 신체/무의식이 드러내는 증상, 즉 기표의 의미에 목말라있기 때문이다). 자신의 증상(기표)에 대한 의미(기표)를 갈구하는 그/녀에게 분석가는 마치 아버지나 신과 같은 초월자의 위치에서 기표를 부여하는 것이다. 분석가의 기표를 통해 기표들(증상들) 위에 억압적 기표가 던져짐으로써 의미가 발생한다. 그리고 이 억압의 기표는 다름 아닌 남근=아버지의 이름이다. 이제 환자는 증상의 반복(기표의 사슬)을 중단한다. 억압을 통해 억압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정신분석가와 신경증자 사이에는 마치 사제와 신자의 관계처럼 권력의 전이관계가 형성되기 때문에 어떤 진단을 내리든 그것을 받아들일 수 있는 순응적 태도를 갖게 된다. 따라서 신경증자의 증상을 낫게 하는 것은 안다고 가정된 주체(분석가)가 아니라 안다고 가정한 환자의 믿음인 셈이다. “네 믿음이 너를 낫게 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마가복음 5: 34)

 

이런 점에서 정신분석이 환자의 억압된 기표들의 사슬들을 찾아 치료할 수 있었던 것은 그 원인을 발견해서가 아니라 오히려 그것을 발명했기 때문이다. 그것은 현재 부재하는 초월론적 가상, 형이상학적 믿음으로서의 남근=아버지의 이름이다. 이후로 정신분석은 초기의 프로이트가 욕망의 본질이라 생각했던 부분충동을 불완전하고 불충분한 것으로 보았고, 그로부터 전체적이고 인간적이며 완전한 충족을 유추해내어 그것을 근친상간적 욕망과 관련지었다. 불완전한 부분충동의 (배후에 있는) 완전한 본체를 상정하여 그것을 전체화되고 인간화된 욕망의 표상에 결부시킨 것이다(뒤에서 살펴보겠지만 들뢰즈/가타리는 부분충동을 그 자체로 자기충족적인 것으로 본다). 또한, 완전한 충족은 곧 오이디푸스적 욕망이라는 등식의 설정으로 인해 인간의 욕망은 부정되고 억압되어야 하는 대상이 되었다.

 

신경증자는 정확히 이러한 오이디푸스 형이상학과 금욕주의 도덕의 틈바구니에서 태어난다. 그래서 이들은 완전한 충족을 갈망하며 결여된 대상=a에 집착하지만, 이 완전한 충족이라는 형이상학은 오이디푸스적 욕망의 완전한 해소를 의미하는 것이므로 이들은 금욕주의적 도덕에 의해 심각한 내면의 가책과 죄의식에 사로잡히게 된다. 즉 오이디푸스라는 형이상학은 자연스럽게 욕망=죄악이라는 금욕주의적 가치론(도덕)으로 귀착되는 것이다. 따라서 오이디푸스적 욕망이 움직이는 곳에는 늘 죄의식이 함께 따라다니고, 쾌락원칙은 현실원칙의 감시와 통제를 받아야 하며, 이러한 현실원칙으로부터 승인된 표상만이 억압을 피할 수 있다. 이로써 욕망은 본질적으로 억압되어야 하는 것이 되었다.

 

정신분석은 이러한 신경증적 욕망을 인간일반의 심리로 보편화하여 욕망 자체를 금욕주의적 입장에서 억압과 부정의 대상으로 삼았다. 들뢰즈/가타리에게 욕망은 삶의 본질로서의 힘에의 의지라고 할 때, 정신분석은 삶을 억압하고 부정하고 있다는 점에서 니체의 비판처럼 니힐리즘적이고 금욕주의적인 단죄의 성격을 가진다. 니체의 도덕의 계보학에 따르면, 금욕주의적 이상은 죄라는 관점에서 모든 고통을 해석하고, 인간은 아무것도 의욕하지 않기보다는 오히려 허무를 의욕한다. 즉 서구 형이상학은 이데아, 형상, 내세, 도덕 등 초월적인 세계나 가치 등의 무=부재에 의지해왔으며, 이는 그 자체로 삶을 가치절하(부차화)하고 부정하며 억압하는 금욕주의의 역사에 다름 아니었다. 이런 점에서 정신분석은 니체가 비판한 서구의 전통형이상학과 금욕주의 도덕의 현대적 판본이라 할 수 있다.

 

 

글을 마무리하며

지금까지의 논의를 정리해보자면, 먼저 프로이트는 욕망의 개념을 최초로 발견했음에도 그것의 비인간적 성격 때문에 중도에 포기하고 말았다. 그래서 그는 부분을 전체화하고 집합을 단일화하며 비-인간을 인간화하는 방식으로 욕망을 합리적으로 표상했다. 그리고 결국엔 인간의 욕망을 오이디푸스적 표상으로 환원하고, 그것을 가치론적으로 억압되고 금지되어야 할 것으로 이해함으로써 (힘에의 의지로서의) 자기상승적인 삶을 부정하는 서구 형이상학과 금욕주의를 재현했다고 볼 수 있다. 즉 정신분석은 금욕주의 도덕의 가치론을 아예 인간의 본성 안으로 끌어들임으로써 욕망을 본질적으로 부정적이고 억압적인 것으로 만들어 버렸다. 따라서 정신분석에서 말하는 욕망은 결여된 것을 대상으로 삼기 때문에 실재하지 않는 표상이나 환상을 생산하는 데 머물게 된다. 들뢰즈/가타리는 이에 대한 근본적인 의문을 제기하며 정신분석의 욕망론을 재고하기에 이른다. 그리고 바로 이런 문제제기로부터 탄생한 것이 들뢰즈/가타리의 안티오이디푸스(의 분열분석의 욕망론)인 것이다.

 

여하튼 최근 국내에 출간된 미셸 옹프레의 우상의 추락은 프로이트의 위조와 날조라는 다소 선정적인 주제의 비판적 평전이기는 하지만, 일견 들뢰즈/가타리의안티오이디푸스를 떠올리게 한다(물론 정신분석 비판의 방향/방식이나 그 깊이는 전혀 다르지만 말이다). 지금까지 국내에서 들뢰즈/가타리의 사상은 여러 가지 이유로 천 개의 고원을 중심으로 소개되어왔다. 그러다 보니 이들이 안티오이디푸스에서 주장하는 분열분석이나 기계적 욕망 등과 같은 중요한 개념들이 다소 불충분하게 논의되어온 측면도 없지 않은 것 같다. 라캉이나 지젝의 사상을 중심으로 다양한 방식의 정신분석 담론들이 쏟아지고 있는 요즈음, 어떤 면에서 1972년에 출간된 들뢰즈/가타리의 안티오이디푸스(적어도 필자에게는) 보다 동시대적이고 새롭게 여겨지는 까닭은 무엇일까? 다시금 이 책을 보며 여러 가지 생각에 잠기게 된다.

 

 

 

 

 

참고문헌

 

미셸 옹프레, 전혜영 옮김, 우상의 추락, 파주: 글항아리, 2013.

장 라플랑슈/장 베르트랑 퐁탈리스, 임진수 옮김, 정신분석사전, 서울: 열린책들, 2005.

지그문트 프로이트, 윤희기/박찬부 옮김, 정신분석학의 근본개념, 서울: 열린책들, 2003.

지그문트 프로이트, 임진수 옮김, 정신분석의 탄생, 서울: 열린책들, 2005.

질 들뢰즈, 이경신 옮김, 니체와 철학, 서울: 민음사, 2001.

질 들뢰즈/펠릭스 가타리, 최명관 옮김, 앙띠 오이디푸스, 서울: 민음사, 1994.

키스 W. 포크너, 한정헌 옮김, 들뢰즈와 시간의 세 가지 종합, 서울: 그린비, 2008.

Jacques Lacan, Ecrits, Paris: Éditions du Seuil, 196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