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예술의 낯설음에 대한 현상학적 고찰 (上)

 

김민정(서울대학교 미학과 박사과정)

 

 

  현대예술은 으레 낯설고 난해한 것이 되었다. 많은 경우 우리는 작품을 감상하기에 앞서 왠지 모를 불편함과 거북함을 느낀다. 재현과 모방이라는 전통 미학의 원리는 완전히 뒤집어진 듯하고, 여기엔 그 어떤 원리도 존재하지 않는 듯하다. 그러나 조금 더 시간을 두고 관찰하면 현대예술은 조금 다른 이야기를 들려준다. 그 기이한 형상들은 우리가 매일같이 살아가는 현실로부터 뿌리를 잘라 낸 무엇 같지는 않고, 오히려 한층 더 깊은 곳의 진실을 은밀히 드러내 보여주는 듯하다.

  독일의 안무가 피나 바우쉬의 탄츠테아터(Tanztheater)는 이러한 현대예술의 낯설음에 대한 하나의 실마리를 제공한다. 탄츠테아터는 전통적 형식에 얽매인 채 테크닉의 완성도를 표현하기에 급급했던 고전 아카데미 무용의 관행을 탈피하고 인간의 문제를 직접적으로 다루고자하는 움직임 속에 태동했다. 그것은 말 그대로 무용과 연극을 결합한 새로운 공연예술양식으로, 우리의 실제 경험에 대한 면밀한 탐구에서 시작하고, 그것을 무대화하며, 나아가 관객의 경험을 통해 완성된다는 이유로 경험의 극이라는 이름을 얻었다. 그러나 무대 위에 나타난 우리의 경험은 우리가 매일같이 맞닥뜨리는 경험과는 왠지 다른 차원에 있는 것처럼 보였다. 장면들은 오버랩 되고, 단절되고, 반복되며, 관점들이 중첩되어 나타났다. 이것은 아무래도 우리가 경험하는 일상적 삶의 모습 그대로는 아닌 듯했다. 그러나 이러한 독특한 양식화 속에서 우리의 눈과 귀는 그 굳은살을 벗고 비로소 보고 들을 수 있게 되었고, 이로써 우리의 경험 그 자체에 비로소 가 닿았으니 이것은 분명 역설이었다. 삶에 한층 더 밀착하여 작업한 결과가, 우리의 자연스런 삶 속에 현상하는 것을 충실히 가시화한 결과가 낯선 결과물을 낳는다는 이러한 역설, 그러한 낯선 결과물이 다시금 우리의 원초적 경험을 되살려놓는다는 이러한 역설은 어디에서 연유하는가?

  우리는 이러한 역설을 사태자체로라는 현상학의 이념에서 다시 한 번 마주하게 된다. 우리가 있는 이곳, 우리가 경험하는 이것이 사태자체일 텐데 우리는 왜 다시금 사태자체로 가야한다는 것일까? 그것은 실재가 실상 아득한 깊이와 폭으로 존재하는 것으로서 우리의 일상의 의식적 차원에서는 은폐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우리에게 현상하는 것이 또한 은폐되어 있다는 것이다. 몇 가지 예를 들어보자. 우리의 모든 감각들은 각각 이미 감각 주체의 생명적인 가치를 띤 것으로 나타난다. 화상을 입은 적이 있는 아이에게 촛불은 문자 그대로 불쾌한 것으로나타나게 될 것이다. 작열하는 태양의 노란 색을 경험한 누군가에게 노란 색은 강렬한 따사로움으로 경험될 것이다. 감각은 결코 순수 즉자적 성질로 주어지지 않는다. 감각은 반드시 어떠한 의미와 함께 나타나는 활동적 성질이며, 감각한다는 것은 결국 세계와의 생명적 의사소통에 다름 아니다. 그러나 사태를 즉자적인 것으로 만드는 객관적 편견 속에 감각이 가진 이러한 다채로운 의미는 사상되고 만다. 그것은 관계 속에서만 진정으로 이해될 수 있는 존재들을 객관화하고 즉자적인 것으로 만들어버리는 것으로, 현상학은 이것이 참다운 인식을 방해하는 것으로 괄호 쳐져야 할 것이라고 말한다. 현상학이 주목하는 현상은 이러한 객관적 사고가 형성되기 이전에 형성하는 것, 습관화되고 지각적으로 무디어진 삶 속에는 감춰져 있던 그것이다. 따라서 현상학이 주목하는 현상을 의식적 차원으로 드러내 보이기 위해서는 현상을 감춘 일상의 의식적인 삶을 재차 반성해 들어가야 한다. 그리고 이렇게 현상학적 반성을 통해 드러난 실재는 우리의 일상적 눈에는 외려 낯설고 기이한 것으로 드러나게 된다.

 

  앞으로 두 편의 글을 통해 이러한 현대예술의 낯설음에 심층적으로 접근해보고자 한다. 1부에서는 몸의 현상학자 모리스 메를로-퐁티가 기술하는 지각의 현상을 다루어본다. 메를로-퐁티는 철학이 철저히 해명해야 할 사태 자체가 우리가 일차적으로 경험하는 바의 체험된 세계(le monde vécu)이며, 철학은 이를 직접적으로 기술하는 것이어야 한다고 한다. 체험 세계는 우리의 모든 행위를 가능케 하는 기초인 지각의 세계로서, 우리는 여기에서 기실 폭과 깊이로 존재하는 실재를 마주하게 될 것이다. 이러한 폭과 깊이의 실재는 일상의 의식적 차원에서는 가려지고 은폐되므로 우리는 이러한 실재를 회복하기 위해 다시금 예술에 기대게 된다. 2부에서는 먼저 메를로-퐁티가 세잔의 회화론을 중심으로 전개한 현상학적 환원으로서의 예술론을 살펴볼 것이다. 메를로-퐁티는 세잔이 고전주의와 인상주의라는 양 극단의 이분법에 모두 의문을 제기하고 원초적 현상 자체에 가닿으려 노력했다는 점에서 현상학적이라고 말한다. 세잔의 그림에서 드러내는 원초적 세계는 문화화 된 인간의 시각에 낯선 충격으로 다가왔고, 이내 우리의 습관적 사고를 중시시켰다. 우리는 세잔의 회화가 드러내는 낯설음의 제 양상이 사태 자체로 나아가는 현상학적 환원의 메커니즘과 맞닿아있음을 확인할 것이다. 아울러 우리는 이러한 낯설음으로서의 현상학적 환원의 메커니즘이 현대 무용계의 한 획을 그은 피나 바우쉬의 탄츠테아터의 작업방식과 작품 속에 드러나는 과정을 살펴볼 것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한 예술가가 굳어진 관습으로 고착화된 기존의 예술의 형식을 탈피하고 비로소 인간과 삶, 즉 사, 불안, 고독, 좌절 등으로 점철된 삶을 섬세한 눈으로 바라보게 되는 과정, 그러한 의미로서의 세계를 지평구조 속에 다시금 펼쳐놓음으로써 우리로 하여금 지각적 실존을 다시금 회복하게 하는 과정을 살펴볼 것이다.

 

 

. ‘깊이로 나타나는 현상

 

  우리에게 경험은 몸과 함께 시작된다. 이는 소극적으로는 우리가 몸을 전제하지 않고서는 어떠한 경험도 가질 수 없음을, 적극적으로는 우리에게 있어 모든 경험이 몸과 관련하여 나타남을 의미한다. 이러한 몸은 필연적으로 구체적인 시공에 위치해 있으면서 주위에 펼쳐진 세계 속 지각적 대상들과 어떠한 관계속에 놓인다. 우리는 세계 속에 몸담고 있으면서 동시에 세계를 향해 나아가는 존재(Être au monde)’로 나타난다.

 

공간 지평과 공간성

 

  몸으로서의 주체는, 반드시 그것이 놓인 주어진 위치를 전제한다. 이에 따라 우리에게 나타난 사물들은 필연적으로 주체가 놓인 특정 위치에서 바라보아진 것으로서, 다시 말해 특정 관점 속에 나타나게 되며 우리의 지각적 경험은 필연적으로 관점 의존적이다. 그러나 나는 단순히 이 자리에 붙박인 채 감각[각주:1]을 그저 받아들이는 수동적 수용자가 아니다. 메를로-퐁티는 한 대상을 바라보는 것이 그 대상에 거주하러 가는 것에 비견된다고 말한다. 대상에 거주한다는 것은 대상이 나에게 떠오르는 방식이, 마치 내가 대상 속에 들어가 앉아 경험하는 듯이 나타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대상은 비단 나의 망막에 비춰진 면으로만 보이는 것이 아니라 그 대상을 중심으로 펼쳐지는 주위의 다른 사물들에 비춰진 면들, 즉 나의 직접적 시선이 포착하지 못하는 면들과 함께 입체적으로 드러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작용은 이에 그치지 않고 시각장 속의 다른 대상들로 확장된다. 다시 말해 우리는 우리가 주목하는 대상 주위로 펼쳐진 지평 속 다른 대상들 모두에 잠재적으로 위치하며, 따라서 우리는 지각장 속 각각의 대상들을 실로 여러 각도에서 지각한다.” 결국 우리의 시선은 사진과 같은 평면적이고 원근법적인 시각이 묘사하는 방식과는 달리 실로 무수한 시선이 교차하는 시각 지평의 장을 통해 대상을 포착한다. 각각의 대상들 주위에는 다른 대상들이 마치 그것들의 숨겨진 측면들의 관찰자들인 것처럼 존재하며 결국 대상은 단지 내 눈의 망막을 때린 이미지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곳에서 보이는 대상이 된다. 그리고 대상은 실로 무한한 시선들에 의해 모든 측면들로부터 관통됨으로써 어떤 불투명한 깊이를 가지게 된다. 예를 하나 들어보자. 나의 눈앞의 컵은 비단 내 눈의 망막에 맺혀있을 2차원의 평면적인 것으로 나타나지 않는다. 나는 직접적으로는 보이지 않는 볼록한 뒷면을 머리로 생각하기 전에 이미 지각하고 있으며, 둥그런 입구를 생생히 느끼고 언제든 입술을 가져다댈 것이다. 메를로-퐁티는 이렇게 사물들이 내 눈에 비친 직접적 이미지를 넘어서는 차원을 가지는 것을 지평의 깊이로 설명한다.

  이러한 공간 속 주체는 필연적으로 공간성을 덧입은 채 나타난다. 공간성을 사상해버리고는 나를 규정할 수 없다는 말이다. 맹인의 지팡이는 그의 신체를 늘려 그가 더욱 자신감 있는 걸음걸이로 활보할 수 있게 할 것이며, 커다란 모자를 쓴 여인은 모자의 크기를 매번 재지 않고도 사물들 사이를 능숙하게 빠져나갈 것이다. 성능이 좋은 자동차를 탄 사람은 언제든지 저 앞으로 튀어나갈 준비가 되어 있으며 불편한 신을 신은 사람의 역량은 위축되고 그의 공간은 쪼그라들 것이다. 이처럼 우리의 몸은 반드시 가능한 행동의 체계로서의 신체, 즉 몸이 해야 할 무엇과 그것이 처한 상황에 의해 규정되는 잠재적 신체로 존재한다. 그리고 세계에 몸담은 주체는 항상 대상들과의 관계 속에 어떠한 방향성를 가지며 이때 대상들은 주체가 세계에 내린 닻과 같은 역할을 한다. 주체는 대상들 속에 뿌리를 내리고 있으며, 항상 어떠한 공간적 수준속에 있게 된다. 공간을 초월한 주체는 우리의 머릿속에만 존재할 뿐이다. 또한 주체를 초월한 공간도 없다. 공간성은 주체와 대상의 관계 속에 항상 전제되며, 이에 따라 존재는 방향 지워지고실존은 공간적인 것으로 나타난다.

 

시간 지평과 시간성

 

 

  시간은 강물처럼 흐르는 것에 비유되곤 한다. 그러나 메를로-퐁티는 이러한 단순한 흐름으로서의 시간, 즉 나와 상관없이 과거에서 현재, 그리고 미래의 한 방향으로 흐른다고 여겨지는 직선적 시간관을 비판한다. 메를로-퐁티는 시간성을 기술하는데 있어 후설의 파지(rétention, 把持, 다시 잡음) 및 예지(protension, 豫持, 앞서 잡음) 개념의 도움을 얻는다. 여기서 나의 현재는 과거를 다시 잡는파지와 미래를 앞서 잡는예지라는 양 방향으로 뻗어 나가는 이중지평의 망 속에 나타난다. 다음은 메를로-퐁티가 후설의 시간의식을 해석한 시간 지평의 그림이다.

 

시간 지평

-수평선: 일련의 '현재들'

-사선: 추후의 같은 '현재'에서 보인 음영들

-수직선: 같은 '현재'의 이어지는 음영들


  현재가 A, B, C로 연이어 나타난다고 하자. 현재 시점이 A에서 B, 그리고 C로 바뀔 때 A는 사라져버리거나 과거라는 곳에 그대로 저장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의 음영, 즉 변양태들로서, B시점에서는 A'(B시점에서 나타난 A시점), C시점에서는 A''(C시점에서 나타난 A시점)로 나타난다. 그리하여 내가 C시점에 있을 때 그러한 C는 즉자적인 C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A''(C지점에서 본 A의 음영)B'(C지점에서 본 B의 음영) 등 지나간 시간의 음영들을 여전히 잡고 있는 것으로 존재한다. C라는 현재는 이러한 파지들을 잡고 있음으로써만 온전히 C인 것으로 나타난다. 결국 우리의 시간 경험에서 현재는 과거를 잡고 있는 것으로서만 오롯이 현재인 것으로 나타난다.

  이때 내가 잡고 있는 과거는 결코 기억 속에 저장되었다가 그대로 다시 떠오른 즉자적 그것 그 자체도, 단순히 매개된 것도 아니며, 현재 시점에서 다시 경험하는 직접적 과거이다. 나는 나의 온 역사를 담은 현재의 몸을 가지고 다시 그 과거의 시점으로 빠져들어 그 시점을 다시 살게 된다. 과거의 특정 시점을 떠올려보자. 이때 나는 그 당시 내가 의미를 두고 경험한 모든 것들, 예를 들어 향기, 소리, 분위기, 심지어 그 당시 시점의 과거 및 미래까지도 모두 함께 다시 경험한다. 어른이 되어 어릴 적 주로 시간을 보내던 장소를 방문해보면, 그 당시에 경험했던 삶의 면면들이 총체적으로 딸려 와서 나는 어느 덧 친구들과 뛰어놀던 놀이터의 흙냄새와 하굣길의 왁자지껄함을 일부러 떠올리지 않고도 생생히 느끼게 된다. 나에게 그 공간은 오직 그러한 어린 시절의 경험들의 색채를 덧입은 채로만 존재한다. 또한 그 공간은 오직 지금 어른의 몸을 한 내가 다시금 경험하는, 다시 말해 새로운 시점으로부터의 경험된 공간이기도 해서 그 곳은 어른 몸의 경험과 어린아이의 몸의 경험이 중첩된 상태의 애매한 경험 속에 떠오르게 된다.

  대상들은 이러한 시간 지평의 메커니즘 속에서 인식된다. 공간 지평 속에서 대상이 지평 속 모든 다른 대상들과의 관계 속에 떠올랐듯이, 시간 지평 속에서 대상은 역시 모든 다른 시간들과의 관계 속에 떠오르게 된다. 이렇게 드러난 대상은 언뜻 우리에게 대상 그 자체인 것처럼 보이지만 우리에게 그렇게 여겨지는 대상은 사실 시간지평과 공간지평의 망의 얽힘 속에 떠오른 대상이다. 대상의 동일성을 보증하는 것은 대상 그 자체라기보다는 이렇게 지평인 것이다.

  메를로-퐁티는 시간 지평의 구조를 통해 주체성에 접근한다. 메를로-퐁티는 시간성으로서의 주체성을 목표를 행한 동작의 속성에 비유한다. 내가 어떤 목표를 가진 특정 동작을 해보일 때, 나의 동작은 이미 그 목표에 있듯이 나는 이미 미래에 있다. 다시 말해 나는 즉자적 이 순간에 있지 않다. 나는 지금 이 순간에 있는 정도로, 또한 오늘 아침이나 곧 올 밤에 있다. 이것은 내가 이 순간에만 순수하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그보다 더 과거, 그리고 그보다 더 미래인 순간들에 잠재적으로 몸을 담고 그러한 시간들 속에 잠재적으로 살고 있음을 말한다.

  객관적 사고의 편견 속에서 이루어지는 객관적 사유는 이러한 지각 및 지각의 지평적 성격을 무시하고 구체성이 결여된 순수한 이념의 세계를 구축한다. 그것은 결국 실체 없는 실체성의 허구에 빠져드는 오류를 범한다. 앞서 살펴본 바에 따르면 시간과 공간의 지평은 주체와 상관없는 객관적 실체가 아니며 주체와 대상 또한 마찬가지다. 주체는 지평 속에 놓인 대상들과 함께 파악된 공간성 및 시간성으로만 기술될 수 있다. 대상들은 주체를 중심으로 한 지평들 상에 놓인 것으로만 존재하며 그 의미는 이러한 지평들의 종합, 즉 지평들의 상호 얽힘 속에서 나타난다. 그리고 이러한 상호 얽힘은 동시다발적으로 무한하게 이루어지기 때문에 실재는 실상 어느 한순간도 명확한 무엇으로 규정될 수 없는 애매한 것, 폭과 깊이를 가진 아득한 것으로 나타난다.

 

 

가시/비가시, 주체/객체의 상호 얽힘


  모든 대상은 시공의 지평적 구조 속에서 유의미한 것으로 떠오른다. 이러한 지평의 망은 직접적으로 가시화되지는 않는 것으로, 메를로-퐁티는 이러한 비가시적인 것이 가시적인 것 이면에 옷의 안감처럼 덧대어진다고 말한다. 비가시적인 안감이 비록 직접적으로 지각되지는 않을지라도 겉감을 모양지우는 실질적인 것이 된다는 것은 가시적인 것과 비가시적인 것의 관계를 선명하게 보여준다. 모든 대상은 실상 시간과 공간 지평의 무수한 망을 통해서 비로소 그 대상성을 획득하게 된다. 우리와 사물의 최초의 만남이 이렇듯 나와 사물 사이의 다각도의 관계 속에 형성되는 의미의 층, ‘직물에 비견되는 두툼하고 결을 가진 층과 함께 나타난다는 것은 결국 나와 무관하게 존재하는 사물 그 자체’, 순수 사물이란 애초에 불가능한 것임을 의미한다.

  또한 내가 사물을 볼 때 나에게 나타난 사물 속에는 필연적으로 나 자신이 겹쳐져 있으며, 나 또한 그러한 사물의 성질을 덧입게 된다. 메를로-퐁티는 이러한 봄과 보임의 상호 교차 현상을 (chair; flesh)’이라는 독특한 개념으로 설명한다. 나무의 거친 질을 느끼기 위해서 나는 그러한 재질에 접촉할 물적 토대로서 두툼한 살이 필요하며, 그러한 재질을 느끼기 위해 나의 살은 또한 스스로를 변형시켜야 한다. 이러한 문자 그대로의 살을 메타포로 한 메를로-퐁티의 개념은 보는 자와 보이는 것의 이상한 유착”, 다시 말해 주체와 대상이 각기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애초에 한 덩어리에서 분화된 것임을 보여준다. 이때 이러한 분화 또한 이분법적으로 전개되는 것이기보다는 뫼비우스의 띠와 같은 형태, 다시 말해 구분되나 분리되지 않는 형태로 나타난다. 살로서의 존재는 어디까지가 나이고 어디에서부터 세계인지를 명확히 구분하기 어렵고 보는 나와 보이는 대상 사이의 경계를 짓기 힘든 현상을 설명한다. 하나의 쉬운 예를 들어보면, 나는 추위라는 현상과 추위를 타는 내가 서로 불가분의 관계로 얽혀있음을 알 수 있다. 이는 메를로-퐁티가지각의 현상학에서도 강조한, 지각하는 주체가 곧 지각되는 세계라는 관점의 연장선상에 있다.[각주:2] 지각의 현상학에서 메를로-퐁티는 하늘의 파란색을 응시하는 나는 그 앞에 초연하게 자리한 관찰자가 아니라 그것에 빠져들어야하며, 그럼으로써 사실상 그것이 내 속에서 스스로 생각하게해야 한다고 한다. 감각의 이러한 특성은 메를로-퐁티가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에서 살이 내 안에서 스스로를 생각 한다고 할 때 거듭 강조되며 이는 결국 봄의 나르시시즘이라 명명된다. 이로써 메를로-퐁티는 지각하는 자는 원리상 지각되는 것이 될 수 없다는 전통적 주객이분법을 그 근본에서부터 무너뜨린다.

  정리해보자. 보고 만지기 위해서는 보고 만지는 대상과 접촉하고 맞물릴 수 있는 물질적인 토대가 나에게 마련되어 있어야 한다. 색을 감각하기 위해서는 그러한 색에 적합한 수용체가, 촉각을 위해서는 접촉하는 표면의 결에 적합한 수용체가 나에게 주어져있어야 하며, 감각은 그러한 수용체가 적극적으로 받아들인 무엇으로 나타난다. 즉 감각은 순수 성질이라 할 만한 것이 그대로 수용되는 것이 아니며, 순수 수동이 아니다. 그러나 이는 바로 이러한 이유에서 감각이 순수 능동이 아님을 보여준다. 내가 무언가를 보고 만질 때, 내가 보고 만지는 것은 단순 사물의 그것이 아니라 그것을 그러한 방식과 결과로서 수용한 나이기도 하다. 따라서 나는 단순이 바라보는 자가 아니라 바라보면서 바라보아진 자가 된다. 즉 나는 지각하면서 동시에 지각되고 내가 능동적일 때 나는 동시에 수동적이게 된다.

  상호 얽힘으로서의 살은 이렇게 몸의 실존이 세계와의 관계 속에 갖는 애매한 존재방식을 설명한다. 즉 몸과 그러한 몸으로서의 주체는 어느 한 순간에도 독립적이고 즉자적인 실체로 존재할 수 없으며 그 존재 자체가 세계 및 타자와의 상호 관계, 그 뒤섞임 속에 정의된다. 몸은 정보기계라 불려도 무방한 무심한 수용체로 생각될 수 없고 주체는 순수하고 투명한 의식이 아니다. 사물 또한 과학주의적 시각에서 보는 것처럼 대상 일반으로서 주체와의 의미 연관 없이 놓인 개체들로 간주될 수 없다.

 

 

일상의 은폐상태와 예술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지각은 주체가 지각함으로써 지각되도록 하는 독특한 구조를 갖는다. 나르시시즘으로도 표현되는 이러한 차원에서 지각은 이미 반성적 차원에 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이러한 반성이야말로 진정한 반성이라는 것이다. 그것은 대상이 최초로 의미로서 다가오는 것이 다름 아닌 지각을 통해서이기 때문이고, 우리는 봄을 통해 비로소 보이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우리는 봄으로써 보이는 지각의 반성적 차원을 통해 진정으로 반성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이러한 지각을 매 순간 수행하고 있으면서도 우리 일상의 의식적 차원은 그 같은 수행을 은폐하고, 시각은 왜곡된다. 메를로-퐁티는 이를 세속적 시각내지 협소하고 일상적인 의미에서 가시적인 것이라 표현한다. 그리고 예술이 이렇게 왜곡된 시각이 놓치는 비가시적 실재를 회복시킨다고 말한다. 예술가는 몸으로 사유하면서 이러한 반성적 차원의 지각을 수행하고 있다는 것이다. 예술가들은 우리가 일상적 삶에서 잊고 있는 이러한 실제 지각의 근본적 차원 속에서 작업한다. 한 예술가들은 스스로 반성적 차원의 지각을 수행할 뿐 아니라 작품을 통해 감상자로 하여금 지각의 반성적 차원을 회복시키는 이들이기도 하. 메를로-퐁티는 소설가란 사물들이 존재하는 방식으로 사상이 우리 앞에 존재하게 만드는 사람이라고 말한다. 그것은 사상이 애초에 사물들의 구체적 실존 속에 얽혀있는 것이라는 것, 그러나 우리는 일상 속에서 사상의 그러한 존재방식을 놓치고 있기에 소설가의 역할은 다시금 사물의 존재방식을 회복시키는 데 있다는 것을 말한다. 구체적 실존을 떠나 삶의 진정한 의미를 알 수 있는 방법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한 형태의 의미구조에 가닿기 위해서는 그것이 우리 앞에 존재하는 실제적인 방식으로 그것을 보는 수밖에 없다.

  그러나 메를로-퐁티는 사물을 우리 앞에 존재하는 가장 실제적인 방식으로 드러내는 진정한 반성이 외려 실재를 규명 불가능해 보이는 낯설음으로 드러낸다고 말한다. 앞으로 부에서는 이러한 현상학적 환원의 메커니즘으로서의 낯설음을 각각 세잔의 회화와 피나 바우쉬의 탄츠테아터에서 나타나는 낯설음의 제 양상들을 통해 살펴보기로 한다. 


이 글에서 이어지는 [현대예술의 낯설음에 대한 고찰 (下)] 편이 곧 게재될 예정입니다.  




 

  1. 메를로-퐁티는 ‘감각’과 ‘지각’을 따로 구분하여 사용하고 있지 않으면서 보다 미시적 차원의 논의를 전개할 때는 ‘감각’을, 보다 일반적이고 전체적인 차원의 논의를 전개할 때는 ‘지각’을 사용하는 경향이 있어 이러한 입장을 따르기로 한다. [본문으로]
  2. 메를로-퐁티의 전기를 대표하는 저서『지각의 현상학』과 후기를 대표하는 유고『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은 모두 사물과 의식이 분화되기 이전의 현상에 주목하여 전통적 주객이분법을 극복하고자했다는 점에서 연장선상에 있다. 단, 전자가 논의의 전개방식에 있어 여전히 ‘의식’-‘대상’이 구별된 상태에서 출발함으로써 일정부분 이분법적 도식의 잔재를 보이고 있다면, 후자는 주체와 대상이 불가분의 상태로 얽혀있는 존재의 구조에 주목하면서 전통적 주객 이분법을 보다 근본적인 차원에서 해체하고 있으며, 살은 이러한 존재의 구조를 설명하는 개념으로 제시되고 있다. 간과되어서는 안 될 것은 메를로-퐁티의 전기 현상학이 이미 후기의 존재론이 본격적으로 기술하는 살의 존재론의 씨앗을 보이고 있다는 점이다. 사실상 전기 현상학에서 나타나는 많은 기술들은 후기에서 등장하는 살 개념과 함께 한층 더 분명히 이해되고 있다.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