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학이 말하는 뇌, 뇌가 말하는 인문학 (上)

 

임상훈(경희사이버대 교양학부 상임연구원)



  

 

1. 인문학과 뇌

 

흔히 인문학이라고 하면 뇌에 관련된 학문과는 거리가 있는 것으로 여겨진다. , 신경 등을 떠올릴 때, 우리는 의학 또는 생물학 등 자연과학을 말하게 되지 인문학을 언급할 일은 없을 것 같다. 과연 인문학이 뇌에 관해서 이야기할 부분은 무엇인가? 또 뇌가 인문학에 대해서 할 수 있는 말은 무엇인가?

 

르네상스와 고전주의 시대를 지나면서 인간에 관한 담론은 신체와 정신으로 분리되어 신체에 관한 연구는 자연과학에서, 또 정신에 관한 연구는 철학에서 다루게 되는 이분법 체계가 지속된다. 그러다 이런 학문 패러다임에 변화가 생긴 것이 19세기 실증주의가 들어서면서부터인데, 이때가 되면 인간의 정신도 과학의 대상으로 삼고자 하는 시도들이 생겨난다. 그러면서 르네상스 이후, 철학이 자연에 관한 담론을 과학에 인계하면서 자연-과학, 정신-철학의 대칭으로 굳어진 체계에 균열이 생기게 된다. 이제는 철학이 정신도 과학에 양도해야 하는가의 물밑 논쟁이 시작된다. 이러한 논쟁은 과학과 철학이 단지 자연과 정신이라는 고유 대상의 차이가 있을 뿐 방법론적으로는 별반 차이가 없는 것인지, 그렇지 않고 방법론적으로 서로 다른, 따라서 각자의 고유한 방법론으로 각자 다양한 대상을 다룰 수 있다는 것인지를 설명해야 하는 인식론적 논쟁을 야기하게 된다.[각주:1] 이 논쟁은 두 가지 방향의 논쟁인데, 첫째는 철학이 과학과 단지 다루는 대상의 문제로밖에 변별성을 유지할 수 없나 하는 철학의 방법론적 자격문제였고, 둘째는 진정 과학적 방법론으로 정신을 다룰 수 있는가 하는 과학의 방법론적 자격문제였다. 철학의 방법론적 자격문제는 서구 전통의 합리주의가 주축을 이루면서 내려오던 철학에서 이른바 형이상학의 위기론이 시작된 것이 거의 비슷한 시기였던 것을 보면 그 파괴력을 짐작하고도 남는다. 이 문제가 철학의 존폐위기로까지 갈 수 있는 심각한 타격을 주었던 것이 분명하다. 그런 의미에서 니체의 출현과 새로운 비(非)플라톤 철학의 등장은 철학사의 차원뿐만 아니라 전반적인 학문체계에 있어서도 가히 혁명적 사건이라 할 수 있다.

 

두 번째, 과학의 방법론적 자격문제는 시간차를 두고 다양한 시도들이 제시되었다. 그 첫 번째 버전이 실증주의다. 과학의 당위성을 지금 여기(hic et nunc)에서 실현되어 있는 것들로, 지금 여기서 지각될 수 있는 것들로 국한되어야 한다는 전제에서 출발한다. 결국, 시간과 공간적 구체성이 강조되면서 (요즈음의 형태와는 좀 다르지만) 사회학이라는 이름으로 인간과학이 출발을 하게 된다.[각주:2] 하지만 딜타이가 주장했듯이 자연과 인간이 서로 연구대상으로서 다르다면 방법론적으로는 같은 적용이 가능해야 자연/인간이라는 대상적 구별과 과학/철학이라는 방법론적 구별에 대한 명확한 논의가 가능해질 것이다. 그러한 차원에서의 논의는 20세기에 들어와 비로소 가능해졌고, 그러한 필요성이 뇌를 인간과 과학을 연결시키는 매개가 되게 하였다.

 

 

2. 뇌에 관한 연구의 역사

 

과거의 문헌들을 보면 뇌에 대한 연구를 언급한 기록들이 많이 등장하는데, 그 자료들을 추적하다 보면 의외로 상당히 오래전부터 뇌에 대한 경험적 연구가 행해졌다는 사실을 알 수가 있다. 문헌상으로 가장 오래된 뇌에 관한 언급은 기원전 17세기에 기록된 것으로 알려진 파피루스 문자기록에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하지만 그 내용을 보면 그러한 기록들이 당시의 뇌연구를 기록해 놓은 것이 아니라 그보다 훨씬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기원전 3000년경의 사실을 다시 옮겨 놓았다는 사실을 볼 수가 있다.


 

 

놀라운 것은 기원전 3000년경 이뤄진 이러한 뇌연구에서 상당한 수준의 국지적 분석이 이미 행해졌고 비록 초보적 단계이나마 뇌의 부위별로 신체기관을 관장하는 영역이 다르다는 사실을 이미 그 당시 사람들은 알아냈으며 실제 특정 부위가 손상됐을 때 환자는 어떤 반응을 보이는지를 구체적으로 묘사하고 있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뇌의 부상으로 안구의 일탈이 발생할 수 있다던가 뇌가 손상되면 환가가 발을 끌면서 걷는다’, ‘관자놀이가 깨진 사람을 관찰하면 그를 불러도 대답을 안한다, 말을 할 줄 모른다등의 내용들이 들어 있다. 특히 뇌의 부상이라는 언급, 그리고 그 부상이 특정 일탈로 이어진다는 언급으로 이미 그 당시 병리학적 방법론을 통한 과학이 이뤄졌음을 알 수가 있다. 또한, 뇌의 기능은 인간이 의식하지 못하는 상태에서도 감각기관뿐만 아니라 운동기관도 움직일 수 있다는 사실을 알려주기도 한다.[각주:3]

 

그 이후로도 메소포타미아 문명과 히브리 문명에서도 뇌연구에 관한 문헌들이 등장하는데, 철학사에서 의미있는 뇌관련 언급은 플라톤의 저작에서 찾을 수 있다. 영혼에 관한 문제를 다루는 티마이오스에서 플라톤은 영혼을 세 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고 언급한다.[각주:4] 그 세 부분이란 지적영역, 분노에 관한 영역, 욕정에 관한 영역이 그것인데, 그 중 지적영역이 바로 뇌에서 관장하는 부분이라는 것이다. 이런 것으로 봐서 플라톤은 뇌를 인간의 사고를 총관장하는 중심으로 여겼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각주:5]

 

이후 등장하는 문헌은 기원전 3세기 헤로필로스와 에라시스트라토스의 이름과 결부가 된다. 이 두 사람은 특히 수많은 해부실험을 통해 뇌의 정확한 모양과 위치를 파악했던 최초의 사람들이다.[각주:6] 그뿐만 아니라 뇌중심주의와 심장중심주의의 논란 속에서 최초로 신경의 존재를 밝혀내 운동을 명령하고 감각을 수용하는 곳은 동맥을 통한 심장이 아니라 신경을 통한 뇌라는 사실을 밝혀낸 이들이다.

 

1세기경에 들어서면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의 주치의로도 유명한 갈레노스의 이름이 등장한다.[각주:7] 갈레노스는 뇌의학뿐 아니라 히포크라테스 이후 근대에 이르기까지 의학, 해부학, 생리학 등에 지대한 영향을 행사하는데 특히 갈레노스는 인체의 기계적 메커니즘이 어떻게 동물적, 인간적 영혼을 가지게 하는지에 관심을 가진 과학자였다. 그것을 설명하기 위해 그가 사용한 개념이 바로 프네우마pneuma’인데, 그에 따르면 폐로 들어온 공기가 프네우마라는 실체와 섞이면서 심장으로 들어와 생명기운이 동맥을 타고 전신으로 퍼지게 된다고 한다. 그리고 이 프네우마가 뇌로 퍼지게 되면 비로소 동물기운이 생기게 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갈레노스는 뇌중심주의와 심장중심주의를 적절히 조화를 시켜, 생명적 유기체는 심장에서 비롯되나 그것이 동물적 유기체로 변할 때,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 바로 뇌라는 것이다. 이렇게 함으로써 뇌와 심장의 관계는 거의 오늘날 수준의 것으로 정리된다.

 



 

많은 학문들이 그렇듯이 중세시대에 들어오면 뇌과학 분야에서도 눈에 띄는 발전은 보기 어렵다. 다만 뇌의 부위에 따라서 정신활동의 분야들도 결정된다는 이론은 거의 정설로 굳어지게 된다. 예를 들어 뇌의 앞쪽(전뇌실)은 상상을 담당하는 부분이고 중간 부분(중뇌실)은 이성을 담당하는 부분, 그리고 뇌의 뒤쪽 부분(후뇌실)은 기억을 담당하는 부분이라는 뇌의 기능론이 중세시대를 관통하게 된다. 따라서 뇌에 관한 역사를 전체적으로 볼 때, 발전적 지식은 엄밀하게 말해 갈레노스 이후 십 수 세기 동안 멈췄고, 그 지식체계는 중세시기를 지나 17세기까지 이어지게 된다.

 

 

이 글에서 이어지는 [인문학이 말하는 뇌, 뇌가 말하는 인문학 (下)] 편이 곧 게재될 예정입니다.

 

 

  1. 우리말로 ‘인식론’으로 번역하는 영어의 ‘epistemology’는 영미철학과 대륙, 특히 프랑스철학에서, 서로 사용하는 의미가 서로 다르다. 영미권에서는 주로 우리나라에서 사용하는 인식론, 즉 인간의 인지와 지식의 구조, 방법 등을 다루는 칸트식의 gnoseology와 관련이 있는 분야로 사용되지만 프랑스 철학에서는 과학 또는 학문들의 구성, 역사, 그들 사이의 상호관계 등에 관련된 담론체계를 말한다. 때로는 우리말로 ‘과학철학’이라는 말로 번역되기도 하지만 그렇게 되면 과학분과학문들에만 국한된다는 오해의 여지도 있다. 일단 이 글에서는 ‘인식론’으로 쓰기로 한다. [본문으로]
  2. 보통 프랑스인들에게는 인간과학 (science de l’homme)이라는 표현이 익숙한 반면, 독일 전통에서는 정신과학(Geisteswissenschaft)이라는 표현이 더 자주 등장한다. 이 두 전통은 단지 표현법에서뿐만 아니라 실제 추구하는 방향도 사실은 조금씩 다르다. [본문으로]
  3. “마지막으로 31번의 경우, 경부척추가 탈구되면 환자는 두 팔과 두 다리에 대한 의식이 없으며 성기가 발기되고 의식없이 배뇨나 사정을 한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Jean-Pierre Changeux, L’homme neuronal, 1983, Fayard [본문으로]
  4. 플라톤, <티마이오스>, 박종현 역, 2008, 서광사 [본문으로]
  5. 인간의 정신이 신체와 관련이 있다는 사고는 다시 크게 둘로 나눠진다. 첫째는 뇌중심주의, 둘째는 심장중심주의인데, 플라톤이 대표적 뇌중심주의 사상가이고 아리스토텔레스가 대표적인 심장중심주의 사상가이다. 요즈음 과학적 지식으로 보면 당연히 플라톤의 뇌중심주의에 손을 들어주겠지만 역설적으로 플라톤의 뇌중심주의는 직관에 의한 판단에서 나왔지만 아리스토텔레스의 심장중심주의는 실증적 경험에 의해 검증된 이론이었다는 것이 흥미롭다. 신경의 존재가 아직 알려지지 않았던 당시에는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가장 확실한 신체기관들 사이의 연결통로는 혈관이었고 혈관들이 모두 심장으로 모이고 있다는 임상적 사실은 아리스토텔레스로 하여금 심장이 모든 신체기능의 중심이라는 결론을 내리게 했다. 과학적 프로세서가 오류로 이끈 대표적 사례라 하겠다. [본문으로]
  6. 당시는 과거 고대사에서 인간의 신체가 해부의 대상으로 허용이 되는 얼마 안되는 시기중 하나였는데, 뇌뿐만 아니라 신체의 다양한 부위에 대한 해부와 기록이 행해졌다. 특히 그 당시는 시신을 해부하는 것은 금기시 되던 때였고, 따라서 이들이 행했던 해부의 대상은 살아있는 사람이었다. 주로 범죄자들을 대상으로 황제가 허락을 한 대상들에 대해 수많은 생체해부를 행한 것으로 전해지는데, 과학의 이름으로 인륜에 치명적 오점을 남기 사례도 된다. [본문으로]
  7. 그 당시 역시 시신에 대한 해부가 금지되어 있던 터라 갈레노스 역시 앞선 헤로필로스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인간의 시신을 해부할 방법은 없었다. 하지만 생체에 대한 실험을 허락했던 잔인한 헤로필로스 시대와 달리 갈레노스의 시대에는 생체해부가 허용되지 않았다. 자연히 갈레노스의 실험 대상은 소, 개, 돼지, 원숭이 등의 동물을 통해 행해졌고, 그런 조건은 헤로필로스의 경우에 비해 갈레노스는 인간의 고유성에 대한 관심보다 동물과의 유사성, 동물적 유기체로의 인간으로 관심이 정착되어졌다. [본문으로]

현대예술의 낯설음에 대한 현상학적 고찰 (下)

 

  김민정(서울대학교 미학과 박사과정)

 

이 글은 앞서 게재 [현대예술의 낯설음에 대한 현상학적 고찰 ()]편에서 이어지는 내용입니다

 

 

세잔의 회화에 나타난 낯설음

 

세잔의 그림은 습관적인 사고를 잠시 중지시키고, 인간이 거주하는 비인간적인 자연의 기반을 드러내 보여준다. 이것은 세잔이 그리는 인물들이 마치 다른 종의 생물로부터 보여진 것처럼 낯설게 나타나는 이유이다. [] 그것은 편안하지 않고, 모든 인간적 표현을 금지하는 낯선 세계이다.

-모리스 메를로-퐁티

 

  메를로-퐁티는 의미와 무의미에 수록된 세잔의 회의영화와 심리학, 그리고 기호들에 수록된 간접적인 언어와 침묵의 목소리와 생전에 출간된 마지막 저서 눈과 마음에서 예술론을 전개하고 있는데, 여기에는 예술과 관련된 낯설음의 특질들이 언급되고 있다. 특히 세잔의 회의에는 화가 폴 세잔의 작업 방식, 그의 작품의 특징, 감상자가 그의 작품을 감상할 때 나타나는 체험에 대한 분석이 다루어지고 있는데 이러한 세 차원 모두에는 낯설음이 중요한 요소로 나타나고 있다. 예민한 감각을 가진 화가는 끊임없이 새롭게 현출하는 세계 앞에 낯설음의 기분을 느끼고, 사물들은 언뜻 어디서도 본 적 없는 듯한 낯선 형태로 구현되며, 그러한 작품을 마주한 감상자는 낯설음의 기분을 느끼게 된다.

  세잔은 철저히 세계에 밀착하여 작업하고자 했다. 이에 따라 그는 먼저 자연에 대한 일차적인 관심을 가지고 자연을 앞에 두고 시작하는 인상주의 양식을 받아들인다. 그러나 세잔은 순간적인 지각을 포착하려 한 인상주의가 다만 빛의 덮개를 포착하는 데 불과한 것이었음을 깨닫고 이를 넘어서고자 한다. 인상주의는 대상들이 순간적으로 우리의 눈을 때리고, 우리의 감각을 엄습하는바를 포착시켜 놓았는데, 우리의 실제 경험에서 대상은 그렇게 순간적인 인상 속에 주어지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세잔은 그보다는 박물관에 있는 예술처럼 견고한 무언가를 만들겠다고 말한다. 그러나 세잔이 구현하고자 한 것은 고전주의적 실재, 즉 절대적이고도 견고한 진리를 가정하는 지성적 개념의 실재도 아니었다. 그는 대상과 유리된 순수 주관의 지성적 구성물도, 순수한 경험의 이상에 기초한 순간적 인상도 아닌 것을 그리고자 했다.

 

회화는 세속적 시각이 비가시적인 것으로 간주하는 것을 가시적 존재가 되도록 한다. [] ‘시각적 소여를 넘어서는 이처럼 탐욕스러운 시각은 존재의 짜임새로 통한다.

 

  화가는 일상의 세속적 시각이 현상의 전부인 양 제공했던 사물들의 외관을 넘어서서 사물의 심층을 파고든다. 언뜻 불연속적 감각 메시지들로 보였던 가시적 외관들은 그것이 사실상 한몸처럼 가지고 있으나 자신 아래에 감추어 두었던 비가시적인 두께와 깊이를 이러한 화가의 탐욕스런 시각 앞에 드러내 보인다. 그런데 일상적 의식을 거슬러 다시금 현상의 깊이로 나아가는 데에는 견고히 뿌리박힌 습관적 태도를 거스르는 낯설음의 감성이 동반되었다.

 

화가는 [] 모든 사물의 요람인 외관 등의 진동을 파악하여 그것을 가시적인 대상들로 바꾼다. 그리하여 화가에게는 오직 하나의 감성만이 가능하다. 그것은 낯설음의 감성이다

 

  세잔은 원근법 회화가 세계를 기하학적으로 지배하기 위한 의도 속에 고안된 발명품이라 비난하면서 선과 엄격성의 기하학적 데생을 능가하는 그림을 그리고자 했다. 그의 시각 속에 대상은 항상 주체와의 미묘한 긴장관계 속에 있었고, 그에 따라 사물들의 외관은 명확하기보다는 어떤 진동 속에 나타났다. 이에 따라 화가에게는 낯설음의 감성이 주요하게 나타났다. 그리고 그러한 낯설음의 감성 속에 나타난 대상들은 낯선 형태를 띠었다.

 

우리의 눈이 차례로 받아들이고 있는 이미지들은 정말이지 서로 다른 관점들로부터 취해지고 있는 것들이 되고 있으며, 따라서 전 표면은 뒤틀려 보였다.

 

  우리의 경험 속에서 대상들은 사실 사진에서 보는 것과 같은 모습으로 나타나지 않는다. 메를로-퐁티는 세잔이 자신의 부인을 그린의 초상화에서 인물의 왼쪽과 오른쪽으로 이어지는 벽지의 무늬가 서로 일직선을 이루지 않는 것에 주목하며, 이것이 대상을 실로 여러 각도에서 지각하는우리의 실제 지각의 현상을 반영하고 있다고 말한다. 우리의 실제 시각은 하나의 시점으로부터 전체를 평면적으로 조망하는 원근법적인 것이 아닌 다중의 관점을 통해 펼쳐지며, 이러한 시각의 실제를 반영하기 위해 인물 뒤 벽지의 무늬는 어긋나는 것으로 그려지고 있다. 메를로-퐁티는 이의 단적인 예로 넓은 종잇조각 밑으로 지나가는 선이 실제로 단절된 것 같이 보이는 현상을 언급한다.

  또한, 세잔은 비스듬히 바라본 접시나 과일바구니의 테두리를 사진에서 나타나는 것과 같은 타원형이 아닌 보다 둥근 형태로 표현하고 있는데, 메를로-퐁티는 이 또한 우리의 실제 지각을 반영한 결과라 한다. 사실상 접시의 테두리는 타원이 아닌, 대략 타원의 형태를 맴돌며 이루고 있는 형태로 나타난다. 왜냐하면, 우리의 눈은 사진기처럼 한순간의 이미지를 수동적으로 포착하는 기계적인 것이 아니라 시공의 지평의 망을 타고 대상을 여기저기서 보면서 탐색하고 의미를 거두기 때문이다. 세잔의 <체리와 복숭아>를 보자. 쟁반은 납작한 타원형이 아닌 거의 위에서 바라본 둥근 형태를 띠고 있으며 따라서 그 안에 담겨있는 체리와 복숭아들은 손을 뻗치면 금방이라도 잡을 수 있는 먹음직스런 형태로 묘사되어 있다. 그리고 체리가 담긴 접시와 복숭아가 담긴 접시는 서로 다른 높이에서 바라본 것처럼 묘사되어 있다. 아마도 세잔에게는 체리가 더욱 먹음직스러웠나 보다.

  그렇다면 우리의 실제 지각을 충실히 반영한 예술작품이 우리에게 낯설게 다가오는 이유는 무엇인가?

 

비스듬하게 본 원이 타원형으로 보인다고 말하는 것은 우리가 사진기가 되었다는 가정하에 우리 눈이 보게 되는 것을 마치도 우리가 하는 실제 지각인 것처럼 간주하는 데에 연유한다.

 

  비스듬하게 바라 본 접시가 언뜻 타원형으로 보이는 듯한 것은 과학주의에 물든 일상의 객관적 사고의 편견에 따라 일상적으로 시각이 왜곡되기 때문이다. 그러한 편견이 습관화됨에 따라 세속적 지각을 마치 실제 지각인양 여기게 되며, 그것을 거스르고 실재를 구현한 지각이 오히려 낯설게 다가오는 것이다. 그러나 메를로-퐁티는 진실한 것은 화가이고, 기만적인 것은 사진이다. 현실에서 시간이 정지되는 일은 없으므로라는 로댕의 말을 인용한다. 우리에게 매 순간의 경험은 앞선 순간의 경험과 곧 이어질 순간의 경험과 함께주어지는데, 사진은 시간의 자기 초월을 파괴하는 반면, 회화는 시간의 이러한 성질을 가시화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1부에서 다루었던 시간지평의 구조를 상기시킨다. 메를로-퐁티는 가시적인 것의 고유한 본질은 비가시성을 어떤 특정한 부재로서 현전하도록 만드는, 엄격한 의미에서 비가시성의 층을 가지는 것이라고 말한다. 가시적인 것은 그 자체 속에 비가시적인 층을 가지고 있으며 이러한 요소가 우리의 실재를 깊이와 두께를 가진 것으로 만든다. 그래서 하늘의 파란색은 어떠한 순수 성질이 아니라 푸른 바다나 시원한 물, 또는 자유의 이념 등 직접적으로는 보이지 않는 푸른 사물들에 결부되어 있으며 시공의 지평 속에 어떤 매듭과 같은 것으로 존재할 것이다. 이렇게 가시적인 것과 비가시적인 것은 깊이와 두께를 가진 살을 이루며, 예술작품은 이러한 살적 구조를 통해 실상 깊이와 두께로 현상하는 주체와 대상의 만남을 가시적인 것으로 드러낸다.

  세잔의 그림은 우리의 습관적으로 굳어진 사고를 멈추게 하고 아직 인간화되지 않은 자연의 기반을 드러내 보여준다. 이러한 자연은 인간과 완전히 무관한 자연, 어떤 야만적 상태를 가리키는 것은 아니다. 메를로-퐁티는 세잔의 작품이 우리의 원초적 지각의 경험, 앞서 시각적 소여를 넘어서는 탐욕스러운 지각으로 표현되었던 그것을 구현하고 있음에 주목한다. 이러한 지각은 일상적 의식 속에 은폐되어 있었고 우리는 그러한 은폐된 실재에 익숙해져 있다. 그것은 문화라고도 불린다. 하지만 이렇게 의식을 흔들어 깨우는 낯선 그림은 곧 일상의 습관적 태도 속에 은폐되어있던 원초적 지각을 일깨우기 시작한다.

  메를로-퐁티가 말한 완전한 환원의 불가능성은 세계와의 소박한 접촉의 감성인 낯설음과 함께 온전히 이해될 수 있다. 후설이 환원을 통해 세계로부터 해방된 의식으로서의 주체가 가능하다고 본 것에 반해 메를로-퐁티는 세계로부터의 그러한 완전한 해방은 불가능하다고 한다. 모든 것을 명확하게 드러낼 수 있다는 신념은, 메를로-퐁티에게 있어 기만적 본성이며 엄격주의가 만들어 낸 허상이다. 환원은 단지 세계의 이유 없는 용출 이외에 아무것도 우리에게 가르쳐줄 수 없으며 따라서 항상 미진한 것을 남겨둔다. 이것은 왜 낯설음이 환원의 계기이자 환원 자체가 되는지를 보여준다.

 

 

피나 바우쉬의 탄츠테아터에 나타난 낯설음

 

 

피나 바우쉬의 탄츠테아터에서 형상은 눈 속의 가시이고, 육체는 관객들로부터 거부된 문장들을 묘사하고 있으며, 개념이라는 감옥으로부터, 그리고 속박의 상흔으로 각인된 발레라는 굴레로부터의 해방을 표현하고 있다.

- 하이네 뮐러

 

  피나 바우쉬의 낯선 무대는 관습적 춤에 대한 이해와 우리 일상의 습관적 사고방식을 뒤흔들었다. 무대 위에 낯설음을 구현하는 것은 일찍이 낯설게 하기라는 20세기 초 브레히트의 연극론에서 시작되었으며 피나 바우쉬의 탄츠테아터는 이러한 브레히트의 연극 이론을 수용하고 있다고 알려져 있다. 그러나 연출 및 무대의 구체적인 양상에서 양자는 적잖은 차이를 보이고 있으며 피나 바우쉬 작품의 핵심적인 특징은 오히려 이러한 차이점들 속에 빛을 발하고 있다.

  브레히트는 연극이 우리에게 자명한 것으로 받아들여져 결코 의혹의 대상이 되어본 적이 없는 사건에 대해 의혹을 품도록 해야 한다고 역설한다. 그는 감정이입을 기본으로 하는 전통극의 토대인 아리스토텔레스적 연극이 관객에게 현실을 마치 자연현상처럼 보이게하는데 문제가 있다고 말한다. 그가 볼 때 아리스토텔레스적 연극은 인간들 사이에 현존하는 관계를 자연스럽고 당연한 관계로 보이도록 하여 관객으로 하여금 무대 위에서 일어나는 일에 대해 무비판적으로 감정이입하게 했다. 그는 전통 연극이 사물을 정밀하게 묘사하는 일 자체에 몰두함으로써 사물에 함몰되었으며, 천박한 사실주의에 머물렀다고 비판한다. 브레히트는 연극을 하는 새로운 방법으로서 거리’(Distanz) 이론을 제시한다. 무대 위에는 극적 환영을 막기 위한 여러 가지 장치들이 마련되었다. 이렇게 무대와 관객들 사이에 거리를 만듦으로써 관객들로 하여금 무대 위에서 제시되는 것이 인공적으로 제작된 것이라는 것이며, 무대 위의 인간들이 극중 인물들과 동일하지 않다는 것을 의식하도록 했다.

  이러한 브레히트의 연극은 감성과 이성을 분리시켜 다루고 있다. 그는 예술을 오로지 감성의 영역으로 보면서 이성과는 상관없는 것으로 보았던 시각에 반대했다. 그러나 우리의 감성은 단순한 외양, 즉 껍데기와 같은 것을 전달하는 데에 머물지 않는다. 그것은 그 이면에 비가시적인 것을 한 몸처럼 가지고 있는 현상과 관계한다. 감성의 영역으로만 여겨져 오던 연극에 이성을 도입하면서 그가 간과한 것은 무대 위에서 행사될 수 있는 아름답고 강력한 감성의 가능성이었다. 이성을 우위에 둔 그의 새로운 연극은 이성과 한 몸을 이룬 감성의 힘, 그 깊이를 놓쳤다. 브레히트의 연극은 감성과 이성의 긴장관계 속에 인식에 이르도록 하는 구조로 이루어져 있다. 그리고 이러한 구도는 미리 계산된 것이고, 관객은 연출가가 미리 준비해둔 길을 따라 해석하게 되었다. 반면 피나 바우쉬의 탄츠테아터는 가시적인 것의 외관에 머무는 감정이입도, 무대 위의 현상과 철저히 거리를 두는 정신도 아닌, 보다 근본적인 방식으로 사태와 관계하려 했다. 바우쉬는 인간이 어떻게 움직이는가 보다는 무엇이 인간을 움직이는가에 관심을 갖는다고 말한다. 이것은 움직임의 외양을 충실히 모방하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움직임이 놓인 맥락, 그 이면의 비가시적 실재를 잡아내겠다는 것이다. 그러나 바우쉬는 그러한 비가시적 실재를 잡아내기 위해 한층 더 깊이 가시적인 세계로 파고들었다.

  피나 바우쉬에게 있어 감각은 미리 구축된 의미의 수단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오히려 몸, 그리고 몸의 직접적 경험이 공연의 주제가 된다. 브레히트와 바우쉬 극의 차이는 단순히 사건 내지 서사가 있고 없음의 차이로 정리될 수 없다. 브레히트가 먼저 사회적 맥락에 초점을 두고 그에 따라 형성된 세계관에 따라 사건들을 조직했다면, 바우쉬는 미리 그 무엇도 정해두지 않고 작업하며 최대한 몸 그 자체를 무대 위에 올려놓기 위해 노력했으며, 이를 통해 몸 자체에 이미 각인되어 있는 사건이 스스로 모습을 드러내도록 했다. 따라서 바우쉬의 극이 낯설다면 그것은 의도되지 않은 낯설음이며, 말하자면 실재 그 자체의 낯설음이었다. 브레히트의 무대가 사회적 맥락에 주목하고 특정한 교훈을 주기를 원했다면 피나 바우쉬의 무대는 일상 속에 가려져 있는 원초적 현상이 관객의 관극경험을 통해 스스로 드러나도록 했다. 바우쉬는 결코 관객을 가르치려 하지 않았으며 오직 경험하도록 했다. 따라서 탄츠테아터의 관객은 직접적 경험 이외의 다른 방식으로 작품을 감상하지 않는다. 이렇게 바우쉬가 구현한 낯설음은 낯설게 인식되도록 의도되었다기보다는 오히려 있는 그대로의 사태를 충실히 옮기고자 한 결과였다는 점에서 세잔이 구현한 현상학적 낯설음과 맥을 같이 하고 있다.

 

  바우쉬는 철저히 사태의 밑바닥에 가닿으려 했다. 무대 디자이너 롤프 보르칙은 피나 바우쉬의 작품들은 진정한 것들과의 관계에 대한 욕망, 진정한 위험을 감행하고, 진정한 체험을 하려는 욕망을 이야기한다.”라고 말한다. 그리고 그러한 진정한 것에의 요구는 우리가 많은 것을 머리로 알고 있다고 믿는 일상 속의 은폐상태를 환원하고 다시금 경험으로 돌아가는 노력으로 이어졌다. “난 많은 것을 경험한다. [그러나] 난 거의 아무것도 모른다. 그것은 그것 자체로 매우 놀라운 일이다. 우리가 얼마나 조금 알고 있는지 말이다.” 그래서 바우쉬의 안무 철학에서 중요시되는 것은 역설적이게도 안무하지 않는 것으로 나타났다. 그것은 바우쉬가 작품을 통해 보여주려 한 것이 사람들이 어떠해야 하는 바가 아니라 사람들이 그러한 바였기 때문이다. 따라서 바우쉬는 무용수들에게 어떤 목적의식을 가질 것을 요하지 않았고 그저 무용수들을 관찰하고 그들의 이야기를 들었다. 그녀는 단원들이 스스로를 인식하고 실험을 해나가는 과정에 되도록 개입하지 않았으며 전반적인 조언도 하지 않았다. 바우쉬는 표현을 무용수들 자신에게 맡겼다. 이것은 그녀가 질문하고, 무용수들이 답하는방식을 통해 구체화되었다.

  바우쉬는 먼저 무용수들에게 하나의 주제를 던져주면서 그들에게 그들 나름의 즉흥적 생각과 표현을 하도록 요구했다. 그들은 질문에 즉각적 반응을 보여야 했는데 그것은 무용수들 자신의 기억과 상상력을 자극했다. 메를로-퐁티는 우리가 진리를 끌어내기 위해서는 부정하지도, 회의하지도 말고, “다만 한 걸음 물러서서 세계와 존재를 보아야하며, “타자의 말에 대해 그렇듯 세계와 존재에 따옴표를 쳐서 세계와 존재에게 말하게 하며, 귀를 기울이기 시작해야한다고 말한다. 그리고 이렇게 확인된 진리를 비의지적 진리라고 말하면서 데카르트의 방법적 회의는 이러한 비의지적 진리를 억압한다고 말한다. 작품을 구상함에 있어 다만 개개의 무용수들에게 질문하고 그들의 즉각적 반응에 주목한 바우쉬의 방법은 존재에게 말하도록 하여 그에 귀 기울여 얻을 수 있는 비의지적 진리를 얻기 위한 것에 다름 아니었다. 이렇게 바우쉬는 무용수들이 어떤 역할로서 고정되기 이전의 것을 생각하게 했고 그들의 즉흥적 반응을 관찰해나가면서 그중 몇 가지를 선택하여 무용수들에게 반복시켰다.

  이러한 과정 속에 만들어진 단편들은 그때그때 작품에 반영되어 무대로 연결되었다. 무용수들은 총체적인 구조의 한 부분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함께 작품을 만들어가는 창조적인 능력으로 여겨졌다. 이들에게 요구되는 것은 고전 무용수들에게 요구되었던 것, 즉 체격, 신장, 균형성 등 외적으로 정해진 기준도, 무용이나 연극의 기술적 완성도도 아니었다. 그들에게는 사회적인, 장르적인 고정관념을 깨고 가장 밑바닥의 것을 끌어낼 수 있는 유연함이 요구되었다. 바우쉬는 안무가의 역할이 무용수들을 그러한 유연한 상태에 이르도록 하는 것이라 생각했다.

  이제 피나 바우쉬의 자전적인 작품이자 대표작인 <카페 뮐러>를 통해 바우쉬가 구축한 낯설음의 양식에 다가가 보자.

 

사랑의 한탄. 추억을 더듬어 움직이고 서로 접촉하는 것. 태도를 택하기. 옷을 벗고 마주보게 되고 상대편 몸 위에 미끄러지는 것. 잃어버린 것을 찾아 가까이 가기. 서로 마음에 들려고 애쓰는 것. 벽을 향해 뛰고, 거기로 달려들어 (몸을 던지고) 거기에 부딪히는 것. 무너지고, 다시 일어나는 것. 사람들이 보았던 것을 다시 만들어내는 것. 모델에 불과한 것. 하나가 되기를 원하는 것. 떨어지는 것. 돌진하는 것. 그는 가 버렸다. 눈을 감고서 하나가 다른 하나를 향해가는 것. 느끼는 것, 춤추는 것, 상처주기를 원하는 것. 방어하는 것. 장애물을 놓는 것. 사람들에게 공간을 부여하는 것. 사랑하는 것.

 

  피나 바우쉬의 드라마투르그로 활동했던 라이문트 호게는 <카페 뮐러>에 대해 기술하면서 이렇게 파편화된 인상들을 나열한다. 그것은 이 작품의 의미가 이러한 파편의 이미지들을 통해서만 충실히 이해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작품에서 장면들은 오버랩 되고, 단절되고, 반복되며, 관점이 중첩되어 나타나는데 피나 바우쉬는 이러한 파편의 원리를 영화의 몽타주 기법[각주:1]에서 영향을 받아 독특한 양식으로 구축해냈다.

  피나 바우쉬의 탄츠테아터에서 몽타주 양식은 이러한 파편들이 만들어내는 독특한 리듬을 통해 세속적 시각 속에는 가려져 있던 지각적 실재를 드러내 보인다. 우리는 1부에서 지각 속에 지평적 실재가 깊이로 현상하는 것을 살펴보았다. ‘지금’ ‘여기에는 상식상 공존할 수 없는 다차원적 시공이 함께 삽입되어 있다. 피나 바우쉬의 작품에서 몽타주는 이렇게 공존 불가능한 부분들의 공존을 가시화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그럼으로써 우리는 외관을 넘어서 현상, 즉 미지의 힘들과 법칙들을 포함한 깊이에 맞닥뜨리게 된다. 그리고 이렇게 지각의 깊이가 예술 작품에서 가시화되면 그것은 일상적 의미의 공간과 시간을 손상시키는 낯설음으로 다가온다. 피나 바우쉬의 작품에서 그것은 형상, 장면, 율동, 분위기 등이 부조화된 것으로 나타난다. 공간의 몽타주는 서로 이질적 장면이 하나의 공간에 공존하는 것으로 나타나며, 시간의 몽타주는 반복 양식을 통해 드러나고 있다.

  <카페 뮐러>의 공간은 사진적이지 않다. 이것은 메를로-퐁티의 공간지평 구조, 즉 우리가 한 대상을 바라본다는 것이 곧 대상에 거주하러 가는 것에 비견되었던 공간지평의 구조로 설명 가능하다. 우리는 대상을 바라볼 때, 그것을 단지 우리의 망막에 비친 평면적인 것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잠재적으로 사방에서 바라보인 그것으로 보며, 이로써 그 대상은 무수한 관점을 통해 보인 것으로 나타난다. 노인의 움푹 팬 주름에는 그가 겪은 슬픔과 고통, 그리고 그가 느꼈을 환희가 켜켜이 스며들어있어, 그것은 그저 어떤 형태가 아니라 삶의 무게가 된다. 우리는 그의 삶의 깊이를 결코 머리로 이해하지 않고 보며, 그래서 저절로 머리가 숙여지게 된다. 우리에게 사람들의 의미는 이렇게 바라보인 그/그녀를 통해, 다시 말해 지각을 통해 주어진다. <카페 뮐러>는 현대인의 고독을 이러한 공간 몽타주로 그려내 보인다. 한쪽에서 한 남자가 괴로움에 몸을 이리저리 던질 때, 다른 쪽에서는 그와 헤어진 여인이 홀로 엎드려 있다. 그 와중에 무대 한가운데에는 눈을 감은 여인이 춤을 추고 있다. 이들은 실제로 한 공간에 존재하는 것은 아니지만, 우리의 지각적 경험 속에서 이들은 서로를 마주하고 있으며, 그럼으로써 이들의 몸부림과 고독이 온전히 설명된다. 공간이 분절됨으로써 한 공간은 다른 공간을 바라본다. 서로 다른 공간에서 바라보인 그 공간들은 그 공간의 인물들이 구현하는 표현의 의미를 다층적인 것으로, 깊이를 가진 것으로 드러낸다. 반성은 더 이상 경험 전체, 본질 자체, 본질들의 주관 내지 형상적인 것으로서가 아니라, 이렇게 지각적 깊이로서의 실재로서 드러난다.

  <카페 뮐러>에서 시간의 몽타주는 반복 양식을 통해, 계속해서 서로를 놓치는 연인을 통해 나타난다. 한 장면에서 이들은 수 분 동안 서로를 놓치는 동작을 반복한다. 그러한 놓침은 극 전반에 걸쳐 조금씩 변이된 채 반복된다. 이것은 의미를 담은 경험이 계속해서 새롭게 현출하는 것을 보여준다. 우리가 경험하는 시간 속에서 현재는 재차 경험되는 과거인 파지를 담고 있다. 반복 기법은 이러한 시간성의 가시적 표현이다. 무대 위에서 동작이 반복될 때 우리가 경험하는 것은 이전의 동작 그 자체가 아니라 두 번, 세 번 경험되고, 또 다른 맥락 속에서 재차 경험되는 그 동작이다. 이것은 우리가 잡고 있는 과거가 현재 속에서 다시 새롭게 경험되는 과거임을 보여준다. 반복은 강렬한 경험을 담은 과거가 지워지지 않고 진한 흔적으로 각인되는 것을, 그리고 새로운 현재의 출현에도 불구하고 새로운 경험 속에 재차 경험되는 것을 보여준다. 이것은 우리에게 의미 있는 과거가 굳이 의식적으로 떠올리지 않고도 저절로 현출하는 것을 보여준다. 또한, 희미하게 무대 뒤편으로 사라지는 연인이 계속해서 보여주는 반복은 미래를 앞서 잡음인 예지를 반영한다. 이렇게 반복 기법은 시간지평의 구조를 통해 나타나는 실재를 가시적으로 만든다. 피나 바우쉬는 계속되는 현재인 무대 위에 과거와 미래를 담은 현재, 즉 두께를 가진 시간을 그려 보인다.

  이러한 무대가 낯설게 다가오는 것은 즉각적 필요와 유용성에 내몰려 사는 우리에게 사실상 깊이와 무한함을 가진 지각적 실재가 가려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곧 몽타주 된 무대와 함께 의식 속에 은폐되어 있던 지평적 실재가 가시화되어 작동하는 것을 보게 된다. 그래서 우리는 다만 무대 위의 파편적 이미지들을 보는 것이 아니라 그것으로부터 초월해 내가 살아온, 그리고 살아갈 시공을 잠재적으로 살게 된다. 우리는 이러한 지각의 초월 작용과 함께 작품을 감상한다. 낯선 무대는 우리가 지각의 세속화된 양태를 벗고 다시금 지각 고유의 반성적 차원을 회복하여 보도록 추동하고, 그렇게 해서 우리는 깊이 속에 펼쳐지는 무대에서 비로소 우리 자신을 맞닥뜨린다. 아무것도 구체적으로 가르쳐주지 않는 그러한 무대에서 우리는 가장 구체적으로 경험하고 반성하며, 가장 감성적이자 철학적이게 된다.

 

  1. 메를로-퐁티는 「영화와 새로운 심리학」에서 영화의 몽타주 양식이 갖는 현상학적 의미를 상세히 다루고 있다. 그는 몽타주가 단순히 부분들의 합 이상을 의미한다고 말하면서 더 나아가 그러한 부분들의 조합에서 파생된 리듬 속에 비로소 의미가 발생한다고 말한다. 그리고 그러한 리듬은 다름 아닌 현출하는 우리의 지각의 실재, 즉 시간 및 공간 지평 속에 떠오르는 실재를 반영한 것이라 한다. 영화는 앞서 구축된 의미를 감각적인 것을 통해 충실히 전달하는 매체에 머물지 않는다. 애초에 영화의 의미는 그것의 독특한 시간적 형식에서 발생하며 영화가 주는 즐거움은 영화의 리듬 속에 베어나는 의미와 불가분의 관계를 갖는다. 메를로-퐁티는 몽타주를 통해 드러나는 이러한 지각적 실재, 그리고 그것을 통해 형성되는 의미가 진정한 감동을 줄 수 있다고 말한다. [본문으로]

경희사이버대학교 공개 특강 <틀짓기 - 최근 프랑스 사상에 있어 정치와 감수성> (11/28)

 

 

 

경희사이버대학교 교양학부에서 <틀짓기-최근 프랑스 사상에 있어 정치와 감수성> 이라는 주제로 공개 특강을 진행합니다. 아래의 내용을 확인하시어 관심 있는 분들의 많은 참여 바랍니다.

 

 

시간 - 20131128일 목요일 19

 

장소 - 경희대학교 청운관 207

 

*누구든 오실 수 있습니다.

 

 

[강의 소개]

예술과 정치의 관계는 무엇일까? 예술에 대한 철학적 사유와 보다 일반적으로 미학적 감수성은 어떻게 정치적인 것의 사유에 공헌할 수 있을까? 특히 "글로벌화"라 불리고 있는 지금 이 시디에 정치적 사유와 예술철학은 어떤 연관성을 가지는가?

 

이 강연은 위와 같은 물음을 주제로 이루어지며, 특히 프랑스에서 나온 사유들을 "틀짓기(enframing)"라는 개념을 통해서 이에 답하려 한다. "틀짓기"라는 용어는 하이데거(Martin Heidegger)의 용어로서 장-프랑수아 리오타르(Jean-Francois Lyotard)에 의해 새로운 방식으로 의미를 부여받게 된 개념이다. 리오타르는 이 개념을 통해서 글로벌 시대의 예술을 해명코자 했다. 이 맥락에서의 "틀짓기"란 어떤 주어진 경제 내에서 감성적인 어떤 것을 만들어내는 것으로서 이해된다. 이 개념을 통해 우리는 "글로벌한" 정치적 격돌의 장에서 미학이 행할 수 있는 역할을 음미할 수 있다.

 

들뢰즈/가타리의 정신분석 비판 (下)

 

한정헌 (연세대 겸임교수)

 

이글은 앞서 게재된 [들뢰즈/가타리의 정신분석 비판 ()]편에서 이어지는 내용입니다

 

 

라캉의 부성은유

 

라캉은 프로이트보다 한 걸음 더 나아가 남근기표의 초월성과 부재의 원리를 자신의 부성은유의 출발점으로 삼고 있다. 그가 주장하는 부성은유는 남근기표로서의 아버지와 오이디푸스적 관계를 잘 보여준다.

 

 

  

우선 어린아이는 어머니의 욕망에 전적으로 의존해 있다. 그리고 어머니와의 이자적인 상상적 관계에서 처음엔 자신이 어머니의 욕망이 될 수 있다고 믿는다. 여기서 어머니의 욕망은 곧 남근(phallus)이다. 다시 말해 어린아이는 어머니가 욕망하는 것이 바로 남근이라고 상상하며, 또한 그의 상상 속에서 어머니가 욕망하고 있다고 믿는 남근이 될 수 있다고 확신한다. 하지만 아버지의 개입으로 한동안 아버지의 기표와 경쟁하다가(오이디푸스 콤플렉스) 자신이 결코 그의 상대가 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어머니의 욕망이 되고자 하는 상상적 합일의 의지를 버리게 된다(거세콤플렉스). 즉 어린아이는 이제까지 어머니의 욕망을 욕망했지만, 아버지의 개입으로 인해 어머니의 욕망이 사실은 자신이 아니라 아버지(의 남근)이며 어머니의 욕망이 더 큰 권위로서 등장한 아버지의 이름에 의존적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어머니의 상상적 남근이 되기를 포기하고) 아버지의 이름을 받아들이게 된다.

 

이제 어머니의 욕망의 자리는 더 이상 자신이 채울 수 없으므로 빈칸=결여로서 남게 된다. 대신에 아버지의 이름이라는 기표가 어머니의 욕망을 대체하며 들어오게 된다. 요컨대 어린아이는 어머니의 상상적 남근이 되려는 오이디푸스적 욕망을 포기하고, 즉 그 욕망을 억압하고, 대신에 아버지의 이름을 받아들인다. 또한, 어머니의 욕망을 대체한 아버지의 이름의 기표가 무의식으로 억압되면서 그것을 대신하는 또 다른 대체표상들=은유적 기표들이 환유적 연쇄를 이루게 된다. 원초적 욕망인 어머니의 욕망은 아버지의 이름으로 대체되면서 억압되어 무의식적 욕망의 원형이 되고, 대신 그 빈자리에 아버지의 이름이 들어오면서(=어린아이가 받아들이면서) 이후에 대체되는 기표들은 모두 남근적이고 아버지적인 욕망의 기표들이 된다. 쉽게 말하면 인간의 무의식 속에는 어머니의 욕망을 대리하는 아버지적인 기표가 있으며 이것이 억압되어 다른 기표들로 대체되면서 기표들의 환유적 연쇄/사슬을 형성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정신분석의 과업은 이러한 억압된 기표들의 연쇄를 찾아서 드러냄으로써 환자의 증상의 원인을 밝히는 것이다.

 

요컨대 최초의 욕망은 무의식으로 억압되고 아버지의 기표로 대체되어 영원한 빈 칸으로 남게 되며 어린아이는 아버지의 기표를 받아들임으로써 거세된 주체=욕망하는 주체=의미있는 존재로서 상징계에 진입하게 된다. 즉 어린아이는 말을 시작함과 동시에 거세된 주체=균열된 주체()로서 이를테면 어떤 상징적 할례를 받게 되는 셈이다. 이런 점에서 (전통적 선험철학에서와 같이) 주체가 먼저 있어서 어떤 것을 욕망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욕망이 주체를 구성하는 것이며, 이 욕망은 어머니의 욕망을 대체한 아버지의 이름이라는 남근기표로서 (이것이 무의식 속에 억압되어 있기 때문에) 의미화되지 못하고 (따라서 억압되어 있기 때문에) 다른 기표들로 대체되어 기표들의 환유적 연쇄가 이어진다.

 

기표들의 환유적 연쇄과정에서 의미화가 이뤄지는 순간은 이 과정의 마지막 지점에 이르러서다. 연쇄가 끝나는 지점에서의 마지막 기표가 최초의 기표로 소급해 올라가 그 위에 얹어질 때 의미가 사후적으로발생하는 것이다(S/s). 마찬가지로 정신분석에서 찾는 기표들의 연쇄는 아버지의 이름이라는 기표가 의미화되지 못하여 굴절되고 증식된 환유적 사슬이라 할 수 있다. 정신분석은 환자의 증상이라는 감성적 기표들을 누빔점 혹은 고정점(point de capiton)으로 정박시켜 의미를 부여한다. 여기서 의미화는 결국 무의식 속의 주체를 찾아내는 일이라 할 수 있다. 즉 누빔점은 증상들=기표들의 무의식적 주체를 찾아 소급시키는 기능을 수행한다. 이것은 결국 어떤 증상이건 간에 기표들의 흐름을 역으로 거슬러 올라가 아버지의 이름이라는 남근기표를 찾는 행위에 다름 아니다. 모든 기표가 아버지의 이름의 굴절된 형태를 띠기 때문이다.

 

 

욕망=죄악의 금욕주의

 

 

   그런데 흥미로운 사실은 정신분석이 신경증, 도착증, 정신병 중에서 주로 신경증을 치료 대상으로 삼고 있다는 점이다. 다시 말해 도착증과 정신병은 정신분석에서 주로 다룰 수 있는 영역이 아니라 할 수 있는데, 정신분석은 그 이유를 오이디푸스 과정에서 찾는다. 그것은 아버지의 이름을 수용하는 과정에서 어떤 문제가 있었거나 아예 받아들이지 않았기 때문에, 즉 주체화의 과정에 어떤 문제가 있었기 때문에 분석가와 환자의 분석관계가 성립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특히 정신분열증 환자의 경우에는 이들의 무의식 속에 아예 아버지의 이름이라는 기표가 기입되어 있지 않으므로 주체가 성립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즉 오이디푸스로부터 비껴가는 증상은 정신분석의 영역이 되기 어렵다. 이에 반해 신경증자는 정신분석가가 부여하는 남근기표를 통해 십중팔구 치료효과를 경험한다. 그래서 이것은 마치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의 일반적이고 보편적인 실체성이 마치 실제로 증명되기라도 한 것처럼 여겨지기도 한다.

 

그러나 들뢰즈/가타리가 보기에 신경증자를 낫게 하는 요인은 분석가의 정확한 오이디푸스 진단에 있다기보다는 양자의 전이관계에 있다. 이는 신경증자의 증상이 비록 오이디푸스적이지 않다 하더라도 분석가와 환자의 수직적인 전이관계에서 분석가가 부여한 기표는 곧 진리가 된다는 말이다. 전이는 일종의 감정의 재현이다. 환자가 자신의 억압된 무의식을 자신의 앞에 있는 분석가에게 투영하여 그 상황의 감정을 재현하는 것이다. 이때 분석가는 환자에게 그의 부모가 될 수도 있고 사랑하는 대상이나 분노의 대상이 될 수도 있다. 말하자면 환자는 급속히 분석가와의 사적인 감정에 돌입하여 그에게 애정을 보이거나 분노하고 저항하는 등 지극히 의존적 상태가 된다(프로이트는 환자의 치료를 위해서는 이런 재현적 전이관계가 필수적인 것이라 보았다).

 

따라서 전이관계는 환자의 실제 증상과 상관없이 어떤 기표를 주든지 의미화를 불러일으킨다. 다시 말해 무의식의 억압 때문에 분석가를 찾아온 신경증자가 바라는 것은 또 다른 억압(의 기표)일 뿐이다(신경증자는 자신의 신체/무의식이 드러내는 증상, 즉 기표의 의미에 목말라있기 때문이다). 자신의 증상(기표)에 대한 의미(기표)를 갈구하는 그/녀에게 분석가는 마치 아버지나 신과 같은 초월자의 위치에서 기표를 부여하는 것이다. 분석가의 기표를 통해 기표들(증상들) 위에 억압적 기표가 던져짐으로써 의미가 발생한다. 그리고 이 억압의 기표는 다름 아닌 남근=아버지의 이름이다. 이제 환자는 증상의 반복(기표의 사슬)을 중단한다. 억압을 통해 억압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정신분석가와 신경증자 사이에는 마치 사제와 신자의 관계처럼 권력의 전이관계가 형성되기 때문에 어떤 진단을 내리든 그것을 받아들일 수 있는 순응적 태도를 갖게 된다. 따라서 신경증자의 증상을 낫게 하는 것은 안다고 가정된 주체(분석가)가 아니라 안다고 가정한 환자의 믿음인 셈이다. “네 믿음이 너를 낫게 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마가복음 5: 34)

 

이런 점에서 정신분석이 환자의 억압된 기표들의 사슬들을 찾아 치료할 수 있었던 것은 그 원인을 발견해서가 아니라 오히려 그것을 발명했기 때문이다. 그것은 현재 부재하는 초월론적 가상, 형이상학적 믿음으로서의 남근=아버지의 이름이다. 이후로 정신분석은 초기의 프로이트가 욕망의 본질이라 생각했던 부분충동을 불완전하고 불충분한 것으로 보았고, 그로부터 전체적이고 인간적이며 완전한 충족을 유추해내어 그것을 근친상간적 욕망과 관련지었다. 불완전한 부분충동의 (배후에 있는) 완전한 본체를 상정하여 그것을 전체화되고 인간화된 욕망의 표상에 결부시킨 것이다(뒤에서 살펴보겠지만 들뢰즈/가타리는 부분충동을 그 자체로 자기충족적인 것으로 본다). 또한, 완전한 충족은 곧 오이디푸스적 욕망이라는 등식의 설정으로 인해 인간의 욕망은 부정되고 억압되어야 하는 대상이 되었다.

 

신경증자는 정확히 이러한 오이디푸스 형이상학과 금욕주의 도덕의 틈바구니에서 태어난다. 그래서 이들은 완전한 충족을 갈망하며 결여된 대상=a에 집착하지만, 이 완전한 충족이라는 형이상학은 오이디푸스적 욕망의 완전한 해소를 의미하는 것이므로 이들은 금욕주의적 도덕에 의해 심각한 내면의 가책과 죄의식에 사로잡히게 된다. 즉 오이디푸스라는 형이상학은 자연스럽게 욕망=죄악이라는 금욕주의적 가치론(도덕)으로 귀착되는 것이다. 따라서 오이디푸스적 욕망이 움직이는 곳에는 늘 죄의식이 함께 따라다니고, 쾌락원칙은 현실원칙의 감시와 통제를 받아야 하며, 이러한 현실원칙으로부터 승인된 표상만이 억압을 피할 수 있다. 이로써 욕망은 본질적으로 억압되어야 하는 것이 되었다.

 

정신분석은 이러한 신경증적 욕망을 인간일반의 심리로 보편화하여 욕망 자체를 금욕주의적 입장에서 억압과 부정의 대상으로 삼았다. 들뢰즈/가타리에게 욕망은 삶의 본질로서의 힘에의 의지라고 할 때, 정신분석은 삶을 억압하고 부정하고 있다는 점에서 니체의 비판처럼 니힐리즘적이고 금욕주의적인 단죄의 성격을 가진다. 니체의 도덕의 계보학에 따르면, 금욕주의적 이상은 죄라는 관점에서 모든 고통을 해석하고, 인간은 아무것도 의욕하지 않기보다는 오히려 허무를 의욕한다. 즉 서구 형이상학은 이데아, 형상, 내세, 도덕 등 초월적인 세계나 가치 등의 무=부재에 의지해왔으며, 이는 그 자체로 삶을 가치절하(부차화)하고 부정하며 억압하는 금욕주의의 역사에 다름 아니었다. 이런 점에서 정신분석은 니체가 비판한 서구의 전통형이상학과 금욕주의 도덕의 현대적 판본이라 할 수 있다.

 

 

글을 마무리하며

지금까지의 논의를 정리해보자면, 먼저 프로이트는 욕망의 개념을 최초로 발견했음에도 그것의 비인간적 성격 때문에 중도에 포기하고 말았다. 그래서 그는 부분을 전체화하고 집합을 단일화하며 비-인간을 인간화하는 방식으로 욕망을 합리적으로 표상했다. 그리고 결국엔 인간의 욕망을 오이디푸스적 표상으로 환원하고, 그것을 가치론적으로 억압되고 금지되어야 할 것으로 이해함으로써 (힘에의 의지로서의) 자기상승적인 삶을 부정하는 서구 형이상학과 금욕주의를 재현했다고 볼 수 있다. 즉 정신분석은 금욕주의 도덕의 가치론을 아예 인간의 본성 안으로 끌어들임으로써 욕망을 본질적으로 부정적이고 억압적인 것으로 만들어 버렸다. 따라서 정신분석에서 말하는 욕망은 결여된 것을 대상으로 삼기 때문에 실재하지 않는 표상이나 환상을 생산하는 데 머물게 된다. 들뢰즈/가타리는 이에 대한 근본적인 의문을 제기하며 정신분석의 욕망론을 재고하기에 이른다. 그리고 바로 이런 문제제기로부터 탄생한 것이 들뢰즈/가타리의 안티오이디푸스(의 분열분석의 욕망론)인 것이다.

 

여하튼 최근 국내에 출간된 미셸 옹프레의 우상의 추락은 프로이트의 위조와 날조라는 다소 선정적인 주제의 비판적 평전이기는 하지만, 일견 들뢰즈/가타리의안티오이디푸스를 떠올리게 한다(물론 정신분석 비판의 방향/방식이나 그 깊이는 전혀 다르지만 말이다). 지금까지 국내에서 들뢰즈/가타리의 사상은 여러 가지 이유로 천 개의 고원을 중심으로 소개되어왔다. 그러다 보니 이들이 안티오이디푸스에서 주장하는 분열분석이나 기계적 욕망 등과 같은 중요한 개념들이 다소 불충분하게 논의되어온 측면도 없지 않은 것 같다. 라캉이나 지젝의 사상을 중심으로 다양한 방식의 정신분석 담론들이 쏟아지고 있는 요즈음, 어떤 면에서 1972년에 출간된 들뢰즈/가타리의 안티오이디푸스(적어도 필자에게는) 보다 동시대적이고 새롭게 여겨지는 까닭은 무엇일까? 다시금 이 책을 보며 여러 가지 생각에 잠기게 된다.

 

 

 

 

 

참고문헌

 

미셸 옹프레, 전혜영 옮김, 우상의 추락, 파주: 글항아리, 2013.

장 라플랑슈/장 베르트랑 퐁탈리스, 임진수 옮김, 정신분석사전, 서울: 열린책들, 2005.

지그문트 프로이트, 윤희기/박찬부 옮김, 정신분석학의 근본개념, 서울: 열린책들, 2003.

지그문트 프로이트, 임진수 옮김, 정신분석의 탄생, 서울: 열린책들, 2005.

질 들뢰즈, 이경신 옮김, 니체와 철학, 서울: 민음사, 2001.

질 들뢰즈/펠릭스 가타리, 최명관 옮김, 앙띠 오이디푸스, 서울: 민음사, 1994.

키스 W. 포크너, 한정헌 옮김, 들뢰즈와 시간의 세 가지 종합, 서울: 그린비, 2008.

Jacques Lacan, Ecrits, Paris: Éditions du Seuil, 1966.

 

 

 

들뢰즈/가타리의 정신분석 비판 (上)

 

한정헌 (연세대 겸임교수)

 

최근 국내에 번역, 소개된 정신분석 관련 저작 중에서 유독 눈길이 가는 제목이 있다. 미셸 옹프레의 우상의 추락(원제: 우상의 황혼 Le Crépuscule d'une idole, 부제: 프로이트의 날조 L'affabulation freudienne, 2010)이다. 니체의 우상의 황혼(Götzen-Dämmerung, 1889)을 책 제목으로 가져다 사용하고 있는 이 비판적 평전은 프로이트가 크게 의존하고 있는 (하지만 마치 그렇지 않은 것처럼 시치미를 뚝 떼고 있는) 여러 철학자의 흔적들을 추적함과 동시에, 그가 정립한 수많은 이론이 철저히 그의 전기적 삶과 연관된 조작과 날조의 산물임을 폭로함으로써 니체, 마르크스와 나란히 거론되어온 거대한 우상의 황혼을 선언하고 있다. 이런 점에서 저자의 프로이트에 대한 입장은 한마디로 안티프로이트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 저작을 대하면서 많은 이들의 머릿속에 자연스럽게 연상될 책 한 권이 있다. 바로 들뢰즈/가타리의 안티오이디푸스(L'Anti-OEdipe, 1972)이다. 아마도 니체주의적 관점에서 프로이트/라캉의 정신분석을 근본적으로 비판한 책이기 때문일 것이다. 들뢰즈/가타리의 안티오이디푸스는 니체의안티크리스트(Der Antichrist, 1888)를 염두에 두고 지은 책 제목인데, 이들이 말하는 오이디푸스는 오늘날의 그리스도교, 새로운 초월적 형이상학으로서의 정신분석을 가리킨다. 즉 이들은 오이디푸스가 플라톤주의와 그것의 대중적 판본인 그리스도교의 형이상학을 반복하고 있다고 보고, 남근을 배후세계 혹은 이데아/형상으로 숭배하는 현대판 사제로서의 정신분석을 통렬히 비판하고 있다.

하지만 여기서 주의할 점은, 이들이 반대하는 것이 오이디푸스로 표상되는 정신분석이지 프로이트 자체는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안티오이디푸스안티프로이트와 동일시해서는 곤란하다. 그렇게 되면 이들이 주장하는 분열분석이나 욕망의 개념도 이해할 수 없는 것이 되고 말 것이다. 이들이 주장하는 욕망은 사실 초기의 프로이트가 찾아낸 개념이기 때문이다.

 

 

프로이트와 기계적 욕망

 

물론 이때의 프로이트는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꿈의 해석(Die Traumdeutung, 1900) 이후의 프로이트가 아니라 주로 과학적 심리학 초고(Entwurf einer Psychologie)를 쓰던 당시, 신경생리학자로서의 프로이트를 가리킨다(이하 과학적 심리학 초고초고로 약하여 표기함). 이 시기에 그는 생물학적이고 해부학적인 측면에 관심을 기울이면서, 뉴런과 뉴런 사이의 물리학적이고 경제학적인 힘=에너지의 관계에서 인간의 무의식에 접근했다. 그러나 이후에 그는 이러한 관점을 계속 밀고 나가지 못하고 해석학적 작업으로 선회한다. 이렇게 되면 인간의 무의식이 어떤 의미, 진실이나 진리를 은폐하고 있다는 사실을 전제하게 된다. 따라서 이제 정신분석가는 흡사 그 배후의 궁극적 의미를 읽는 해석학자와 같은 시선으로 환자를 살펴보게 되었으며, 이런 점에서 정신분석은 (배후의) 진리를 찾는 형이상학과 동일한 기반을 가지게 되었다.

 

     

 

 

들뢰즈/가타리의 입장에서 볼 때 이것은 초고를 쓸 당시의 (-인간적이고 기계적인) 리비도 중심의 심리학에서 리비도의 흐름을 자아의 통제 아래에 두는 자아심리학으로의 (인간주의적이고 남근중심적인) 후퇴를 의미한다. 미리 말해두자면 안티오이디푸스에서 들뢰즈/가타리가 말하는 욕망(désir)(스피노자의 코나투스conatus, 니체의 힘에의 의지Wille zur Macht, 베르그손의 생명의 약동élan vital 등과 함께) 프로이트가 초고에서 논하는 무의식 혹은 리비도의 흐름과 관련된다. 이 책에서 프로이트는 인간의 욕망에 대해 생리학적 입장에서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그것들[정동Affekt과 욕망]은 둘 다 ψ[뉴런]에서의 양Qἠ적인 긴장의 증가--정동의 경우는 갑작스러운 해방에 의해, 그리고 욕망의 경우는 가중에 의해 야기된다.”[각주:1] 여기서 양은 생리학적으로는 뉴런들 사이를 자유롭게 흐르고 이동하는 힘=에너지의 내포량=강도량(des quantités intensives)을 뜻한다. 프로이트가 자주 사용하는 자극이라는 말도 에너지가 뉴런에 집중=투여=투자되어(besetzt=invested) (뉴런을) 흥분시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이 은 나중에 성충동의 에너지로서의 리비도’(libido)로 불리게 된다. 리비도가 갈망혹은 욕망을 가리키는 라틴어라는 점에서 알 수 있듯 이것은 프로이트가 생각한 원초적인 욕망의 개념이라 할 수 있다.[각주:2] 따라서 이 당시의 프로이트에게 있어서는 욕망=(에너지)==리비도=강도량의 등식이 성립했다고 볼 수 있다. 바꿔 말하면 그는 욕망을 표상의 관점이 아니라 힘들의 생산의 관점에서 접근했던 것이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들뢰즈/가타리가 안티오이디푸스에서 주장하는 욕망의 원형이 된다.

 

정신분석의 위대한 발견은 욕망하는 생산, 무의식의 생산들의 그것이었다.[각주:3]

 

[] 프로이트는 욕망의 주관적 본성 혹은 추상적 본질을 발견하고 있다. [] 프로이트는 단적으로 욕망 자체를 최초로 찾아낸 사람이다. (AO, 441)

 

주목할 만한 것은 (초기의) 프로이트가 초고에서 인간 무의식의 작동을 철저히 리비도의 기계적 작동, 즉 강도량의 형성, 이동, 방출로 설명하고 있다는 점이다. 다시 말해 신경생리학자로서의 프로이트는 욕망을 생리학적 관점에서 리비도=강도량의 형성과 흐름으로 이해했다. 그러니까 리비도의 흐름은 기본적으로 뉴런의 양적인 흐름으로서 무제약적이고 공격적이며 비-인간적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속성을 프로이트는 스스로 기계적 원리라고 표현했으며[각주:4], 들뢰즈/가타리는 이를 이어받아 욕망=리비도의 성격을 기계적’(machinique)이라는 말로 집약한다. 물론 프로이트가 본래 사용한 기계적’(mechanisch)이라는 용어는 리비도의 양적인 성격을 강조하기 위한 것이란 점에서 기계론적’(mécanique)이라는 말과 크게 다르지는 않다. 그러나 이것은 생물학적 원리라 할 수 있는 유기체적이고 자아 중심적인 항상성의 원리에 제한되지 않고 오히려 그것을 위협하고 넘어서고자 한다는 점에서 비-인간적이고 유물론적이며 외부적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들뢰즈/가타리는 이러한 욕망 혹은 리비도의 기계적 원리를 강조하기 위해 기존의mécanique=mechanical이라는 말 대신에 사전에 없는 machinique=machinic이라는 말을 만들어 사용한다. 이들의 책에서 기계적 욕망’(désir machinique)이라는 말이 마치 한 단어처럼 사용되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 기계적 욕망은 자아나 주체와 무관하게 철저히 자유롭고 비인칭적인=-인간적인 리비도의 흐름이라 할 수 있다. 이런 점에서 프로이트는 리비도의 저장소를 비인칭적인 그것’(das Es=le ça=id)이라고 이름 붙였던 것이다. ‘그것은 영미권에서 흔히 이드’(id)로 번역되어 널리 쓰이고 있지만, 본래 게오르크 그로데크(Georg Groddeck)로부터 빌려온 것으로, 인간 안의 비-인간적인 것을 뜻하는 니체적 개념이다(자아와 이드, 361-362).

라플랑슈/퐁탈리스는 프로이트가 그것이라는 비인칭적 개념에 끌린 이유를 그로데크의 수동적 자아론에서 찾는다.[각주:5]내가 말하고 있는 사람이 바로 게오르크 그로데크인데, 우리가 자아라고 부르는 것은 본질적으로 우리의 삶 속에서 수동적으로 행동하고, 그의 표현대로, 우리는 알지 못하고 통제할 수 없는 어떤 힘에 의해서 살게 된다고 지칠 줄 모르게 주장하는 사람이다.”(자아와 이드, 361-362) 즉 욕망의 주체는 ’, ‘’, 혹은 /가 아니라 미지의 그것이라는 이야기다. 내 안에 있으면서 에게 귀속되지도 제어되지도 않는 이 괴물은 단지 기계적 원리에 따라 욕망을 생산하고 표상들을 자유롭게 실어 나른다.

이와 같이 프로이트의 그것은 상당 부분 니체로부터 가져온 개념이며 니체와 프로이트의 접속에 의해 탄생한 소위 비-인간적이고 초-인간적인 욕망의 개념화라 할 수 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프로이트가 니체주의자라는 말은 아니지만, 프로이트가 적어도 힘/에너지에 대해 니체와 공통적인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는 점만큼은 부정할 수 없다.[각주:6] 그리고 들뢰즈/가타리는 니체를 사이에 두고 프로이트와 접속함으로써 프로이트 사상의 내부의 외부, 기계적 욕망의 개념을 발전시킨 것이다.

 

 

프로이트/라캉의 결여로서의 욕망

 

그러나 프로이트는 탈인간적인 욕망 자체(즉자적 욕망)의 개념에서 곧바로 (들뢰즈가 개념적 차이라고 표현하는 것과 같이) 개념적 욕망 혹은 표상적 욕망으로 후퇴하고 만다. 뛰어난 신경 생리학자였던 프로이트는 욕망 자체, 즉 비개체적이고 비-인간적이며 분자적인(분열증적인) 기계적 욕망을 철저히 생물학적 개체와 심리적 자아라는 개별성(individuality) 속으로 가져가 이해했다. “그러나 오이디푸스와 더불어, [정신분석의 욕망하는 생산의] 발견은 하나의 새로운 관념에 의하여 금방 가려진다. [] 무의식의 생산단위들 대신에 표상이 들어서고 생산적 무의식의 자리에는 자기를 표현하는 일밖에 할 줄 모르는 무의식(신화, 비극, ……)이 들어섰다.”(AO, 45-46) 다시 말해 욕망의 주체를 그것으로부터 자아로 가져오게 되면서 욕망은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정신분석에서의 대표적 표상들인 남근, 오이디푸스, 가족 삼각형 등에 의해 억압되어 부정적이고 반동적으로 형성된 어두운 힘으로 존재하게 되었다. 프로이트가 최초로 찾아낸 기계적 욕망은 이제 의식적 자아 혹은 표상의 주체에 의해 물신적으로 전도되어 욕망의 표상이 아니라 표상의 욕망으로 환원된 것이다. “무의식은 참된 자기, 즉 하나의 공장, 하나의 작업장이기를 그치고 하나의 극장, 즉 무대와 연출이 되고 만다. 그것도 프로이트의 시대에 있었던 것 같은 아방가르드의 극장(베데킨트 Wedekind)이 아니라 고전적 극장, 표상의 고전적 질서가 되고 만다.”(AO, 88)

 

 

자크 라캉은 프로이트의 언어적 혹은 해석학적 전회를 이룬 꿈의 해석(1900)을 비롯해 일상생활의 정신병리학(1901), 농담과 무의식의 관계(1905)등을 중심으로 프로이트로의 복귀를 주창한다. 이 저작들에서 프로이트는 주로 신경생리학이나 리비도 경제학적 관점으로부터 언어적 혹은 해석학적 관점으로의 커다란 전환을 보이고 있다. 망각, 말실수, 농담 등 언어적인 것을 통해 무의식의 은폐된 진실을 찾아내고자 한 프로이트의 이 작업을 라캉은 정신분석의 나아갈 길이라고 본 것이다. 이에 따라 라캉은 프로이트의 무의식을 리비도 경제학이나 에네르기학적 관점에서 보지 않고 철저히 언어학적 관점에서 해석한다. 이에 대한 그의 입장은 무의식은 언어처럼 구조화되어있다라는 말 속에 집약되어 있다. 이런 점에서 그는 프로이트의 그것에 상응하는 실재계나 자아에 상응하는 상상계보다는 초자아에 상응하는 상징계에 우선성을 둠으로써 프로이트를 언어학적으로 재해석하고, 그것을 이른바 프로이트로 돌아가는가장 바람직한 길이라고 보았다.

라캉은 우선 프로이트에게 드리워져 있는 생물학적(해부학적)이고 실재론(본질론)적이며 목적론적인 성격을 중성화하고 프로이트의 남성적인 리비도를 계승하되 소쉬르의 언어학을 (기호중심에서) 기표중심으로 재해석하여 그것을 상징계에 관련시킴으로써 인간의 자연적이고 본원적인 욕구(besoin=need)의 위상을 (상징계에 비해) 축소시켰다. 다시 말해 생물학적 인간이 언어를 중심으로 한 상징계에 첫발을 내딛는 순간을 사실상 논의의 출발점으로 설정하여 욕구보다는 욕망(désir)의 문제에, 즉 주체화의 문제에 천착했다. 인간은 자신의 욕구를 언어적/사회적인 요구(demande)로 번역함으로써 거세된 주체=균열된 주체()로 욕망(의 그래프) 앞에 서게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주지하는 바와 같이 욕망=욕구-요구라는 등식이 성립하게 된다.

 

욕망은 만족을 향한 갈망도, 사랑을 향한 요구도 아니다. 그것은 욕구로부터 요구를 뺀 차이, 즉 그것들[욕구와 요구]의 분열(Spaltung)이다.[각주:7]

 

욕망은 요구가 욕구로부터 분열되는 가장자리 속에서 형성된다.[각주:8]    

 

이때 라캉이 말하는 욕망은 욕구가 언어에 의해 매개되면서 그중 일부가 빠져나간 찌꺼기 혹은 과잉에 해당한다. 이런 점에서 욕망은 결국 충족되지 못한 욕구라 할 수 있다. 가령 유아가 울면서 자신의 욕구를 표출할 때, 부모는 그 울음의 의미를 (언어적으로) 해석함으로써 욕구를 요구로 환원한다. 이것은 성인이 되어서도 마찬가지다. 아무리 언어적 요구로 결여된 자리를 보충하려 해도 그러면 그럴수록 이리저리 옮겨 다니는 빈칸을 채울 수 없다. 즉 욕망은 본능적 욕구에서 언어적 요구를 뺀 나머지, 혹은 실재가 상징을 통과하면서 밑으로 가라앉은 잔여물을 가리킨다.[각주:9] 따라서 욕망은 언제나 (충족되지 못한 욕구에 대해) 대체 가능한 표상들의 가면을 쓰고 나타나 움직이는 빈칸을 채우며 작동하게 된다. 이 빈칸은 욕망의 대상으로서의 소타자로 나타나며 (어떤 선험적으로 주어진 주체가 소타자와 마주하는 그런 방식이 아니라) 이것에 의해서 주체가 구성된다. 그래서 라캉의 L도식에 따르면, 주체(S=sujet)가 타자(A=autre)를 만나는 방식은 언제나 자아(a')와 소타자 a의 상상적 관계(상상축)에 의해 매개되는데, 이런 점에서 우리가 생각하는 전통적인 선험적 주체는 어디에도 없다. 오히려 주체는 (언어가 기원하는 장소로서의) 대타자(A), (타자가 보여지는 상으로서의) 소타자(a'), 그리고 (소타자와의 관계 속에서 라고 상상되는) 자아(a)에 의해 구성된다. 즉 주체 S는 선험적으로 고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A, a, a' 에 의해 구성 및 결정된다는 것이다.[각주:10]

 

 

 

요컨대 라캉이 말하는 욕망은 언어에 의해 억압된 무의식적인 것이며, 현실계에서 환상대상(objet=a)의 모습으로 부단히 환유된다. 다시 말해 아버지의 이름(=언어=상징계)에 의해 균열된 주체는 그 결여를 환상적인 대상 a를 통해 채우고 싶어 하며, 결코 채울 수 없는 영원한 갈증이 시작되는 것이다. 유명한 라캉의 환상공식(d a)은 이것을 설명하기 위함이다. 환상공식에서 욕망(d=désir)은 균열된 주체()가 완전한 충족에 이르기 위해 환상대상 a를 끊임없이 추구하는 과정을 보여준다. , 욕망은 균열된 주체가 (그것만 취하면 완전한 충족에 이를 수 있을 거라 믿는) 환상대상 a와 마주 서면서 생성된다. 물론 주체는 a와의 거리를 결코 좁힐 수 없다. a는 고정된 대상이 아니므로 부단히 다른 대상으로 바뀐다. 다시 말해 욕망은 결코 완전히 충족될 수 없다는 것이다.

 

 

부재 위에 기초한 형이상학

 

이미 살펴본 것처럼 프로이트는 초기에 신경생리학적 관점에서 인간의 무의식적 작동방식, 인간 안의 비인간인 그것의 욕망, 리비도의 기계적 생산원리를 최초로 발견했으나, 그것을 계속 밀고 나가지 못하고 남근이라는 초월적 기표를 중심으로 조직화하였다. 이로 인해 욕망은, 기계적이고 생산적(=생산하는)이며 분자적인 욕망의 흐름으로서가 아니라 오이디푸스 삼각형의 은밀하고 협소한 범주 안으로 제한된 의미를 띠게 된다. 여기서 남근의 화신인 아버지는 거세위협을 거세콤플렉스로 현실화시키는 초월적 존재로 작용하며 어린아이의 경우 어머니를 포기하고 아버지와의 동일시를 통해 주체로 자리매김하게 된다(물론 아버지 역시 실제로 남근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가지고 있다고 가정되는 존재이다). 이때 아버지는 살아있는 현실대상으로서의 아버지라기보다는 상징계의 상징으로서 아버지의 이름(nom-du-père)=아버지의 금지(non-du-père)라 할 수 있다. 프로이트/라캉에게 아버지는 살아있는 생물학적 아버지가 아니라 죽은 아버지, 초월적인 존재로서 금지를 명하는 자, (실재하지 않기 때문에) 이름=금지(nom=non)로만 존재하는 (죄의식의 내면화로서의) 초자아, 혹은 남근적 기표의 초월적 심급으로서 대타자(Autre)를 뜻한다.

들뢰즈/가타리는 정신분석이 이런 죽은 아버지, 아버지의 이름, 초월적 남근기표라는 부재에 근거하고 있다는 점을 들어 비판한다. “여기서는 오이디푸스의 제국주의가 부재 위에 기초를 두고 있다.”(AO, 94) 이들이 말하는 부재(absence)란 현실적 부재를 의미하는 것으로, 이는 어떤 근본적인 배후를 가리킨다. 다시 말해 현실적으로 부재하지만, 그 이면/배후에 자리하는 어떤 아르케’=원형이 바로 남근이라는 것이다. 여기까지만 기술해도 우리는 들뢰즈/가타리가 어째서 정신분석을 형이상학적이라고 평했는지 어렵지 않게 이해할 수 있다. 왜냐하면, 서구 형이상학의 본질은 지금 이 현상적 세계에 없는 어떤 참된 세계, 진정한 세계, 진리를 전제하는 데 있으며, 그 대신에 이 현상세계를 가상으로 여기기 때문이다.

요컨대 정신분석은 인간을 남근’(phallus)(남근을 가지고 있다고 가정되는) ‘아버지’(의 이름)라는 중심기표를 통해 종합하고자 한다는 점에서, 바꿔 말해 부재하는 남근과 죽은 아버지라는 선험적 가상’(transcendental illusion)을 통해 설명하려 한다는 점에서 일종의 형이상학이라 할 수 있다. 다시 말해 우리가 알 수 없고 볼 수 없고 만질 수 없는 배후세계에 남근 혹은 아버지의 이름이 작동하고 있다는 식의 논변은 그 자체로 형이상학적인 것이다.

 

이 글에서 이어지는 [들뢰즈/가타리의 정신분석 비판 (下)] 편이 곧 게재될 예정입니다.

 

 

 

 

 

  1. 지그문트 프로이트, 임진수 옮김, 「과학적 심리학 초고」, 『정신분석의 탄생』(서울: 열린책들, 2005), 249-250. [본문으로]
  2. 장 라플랑슈/장 베르트랑 퐁탈리스, 임진수 옮김, 『정신분석사전』(서울: 열린책들, 2005), 122. [본문으로]
  3. 질 들뢰즈/펠릭스 가타리, 최명관 옮김, 『앙띠 오이디푸스』(서울: 민음사, 1994), 45. 이후 AO로 약하여 쪽수와 함께 본문에 표기 [본문으로]
  4. 지그문트 프로이트, 윤희기/박찬부 옮김, 「자아와 이드」, 『정신분석학의 근본개념』(서울: 열린책들, 2003), 250. 이후 「자아와 이드」로 약하여 쪽수와 함께 본문에 표기 [본문으로]
  5. 장 라플랑슈/장 베르트랑 퐁탈리스, 『정신분석사전』, 75. [본문으로]
  6. 질 들뢰즈, 이경신 옮김, 『니체와 철학』(서울: 민음사, 2001), 206-207. [본문으로]
  7. Jacques Lacan, Ecrits (paris: Éditions du Seuil, 1966), 691. [본문으로]
  8. 위의 책, 814. [본문으로]
  9. 프로이트나 라캉은 욕망이 본능이나 욕구로부터 파생되어 나온다고 보는 데 반해, 들뢰즈/가타리는 오히려 욕구가 욕망에 의해 파생되는 것으로 본다. 다시 말해 욕구는 인간이나 사회의 욕망에 의해 만들어진다는 것이다. AO, 49. [본문으로]
  10. Jacques Lacan, Ecrits, 53-54.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