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이데이아 홍릉> 겨울에 오픈

경희사이버대학교에서는 교양학부의 이념을 한국 사회에서 보다 널리 공유하고, 교육에서 소외된 계층에게 교양 교육을 제공할 목적으로 <파이데이아 홍릉>(가칭)을 계획하고 있다. 

겨울에 오픈할 파이데이아 홍릉에서는 인문학을 중심으로 다양한 형태의 강좌가 열릴 예정이며, 아울러 현대 사상에 대한 본격적인 연구도 병행될 예정이다.

서울의 중심부나 다른 지역들에 비해 문화적 공간이나 사건이 비교적 취약한 동부에 새로운 학문적-문화적 장소를 창출함으로써, 주변의 여러 사람들, 기관들이 함께 할 수 있는 새로운 기회를 제공할 것이다. 장소는 산림청과 롯데백화점 사이에 자리 잡을 예정이다.

<웹진 파이데이아> 오픈

경희사이버대학교 교양학부에서는 보다 많은 사람들에게 교양의 맛을 전달하기 위해 <Webzine PAIDEIA>를 개설했다. <웹진 파이데이아>는 원고지 50매 내외 분량의 서평, 시평(時評), 문화평, 에세이, 기행문 등등 다양한 글들을 한달에 2~3편씩 게재할 예정이다.

마음속 깊이 박힌 가시를 뽑아내기

<인셉션> (2010,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


이정우



빼어난 사이버펑크 영화들의 공통된 특징들 중 하나는 진부한 소재를 독창적인 주제를 통해 다룬다는 점이다. <블레이드 러너><공각기동대><매트릭스> 등을 그 흥미진진한 주제와 (그것을 뒷받침하는) 영상기술적 측면들을 제외하고 본다면 도대체 무엇일까? 범죄영화? 액션영화? 어쨌든 전형적인 할리우드 영화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라고 해야 할 듯하다. 그러나 철학적인 주제와 새로운 영상기법들은 관객들로 하여금 소재들에서의 이 평범함을 잊게 만들기에 충분하다. <인셉션> 또한 이런 특징을 유사하게 보여준다. 사실 그 소재의 진부함과 스토리 전개의 상투성을 놓고 본다면 기존 사이버펑크 명작들을 충분히 능가할 정도이다.(<인셉션>을 사이버펑크 영화로 봐야 할지, 보다 넓게 SF로 봐야 할지는 논쟁의 여지가 있을 것이다) 대부분 어디에선가 자주 본 그런 장면들, 대사들이다. 꿈속-세계에 대한 묘사도 초현실주의적이기보다는 다소 논리적/법칙적이고 밋밋하게 느껴진다. 그럼에도 이 영화 역시 위의 영화들처럼 이런 상투성을 한참 잊어버리게 만들 정도로 독창적인 주제와 신선한 영상으로 가득 차 있다. <매트릭스> 이후의 걸작이라 할 만하다.

<공각기동대>와 <매트릭스>가 그랬듯이, 이 영화 역시 매우 존재론적이다. 여기에서 “존재론적”이란 이 영화가 세계의 어떤 사건들을 다루고 있는 것이 아니라 세계‘들’ 사이에서의 사건들과 세계‘들’ 사이에서의 관계들을 다루고 있음을 뜻한다. 다시 말해 이 영화 역시, 보통 영화들처럼 ‘이 세계’에서 벌어지는 사건들이 아니라 이 현실세계와 다른 어떤 가능세계들(possible worlds) 사이에서 벌어지는 사건들의 관계를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 존재론적이다. <공각기동대>가 고도로 네트화된 세계에서 현실세계와 네트의 세계를 가로지르면서 진행된다면, <매트릭스>는 실제 세계와 기계들이 만들어낸 가상세계 사이를 오가면서 진행된다. 마찬가지로 <인셉션>은 현실세계와 꿈속세계(나아가 꿈속세계‘들’)를 오가면서 펼쳐진다. 놀란 감독의 전작들인 <메멘토><인썸니아><프레스티지> 등이 그랬듯이 <인셉션>도 인간 마음의 깊숙한 곳으로, 매끈하게 통합된 하나의 마음이 아니라 복수화되어 있고 미로처럼 얽혀 있는 마음/마음들 속으로 뛰어 들어간다.

그러나 이 영화를 단지 흥미진진한 발상과 뛰어난 영상미로 엮인 ‘재미있는’ 영화 이상으로 만들어주고 있는 핵심 요소는 주인공 코브와 그의 아내 멜(멜로리)의 관계이다. 작품 전체를 처음부터 끝까지 일관되게 꿰어 주고 있는 이 주제를 통해서 이 영화는 비로소 드라마로서의 깊이를 갖출 수 있었다고 하겠다. 전체를 엮어주고 있는 이 주제가 없었다면, 영화의 맛이 주는 것은 반감 그 이상일 것이다. 멜이 등장하는 장면들은 모두 의미심장하다. 멜이 등장함으로써 장면의 흐름이 극적인 반전을 겪게 되며, 영화의 주제가 한 단계씩 심화된다.(이 점에서, 영화는 공식적인 주인공인 코브의 시선을 통해서만 그녀를 비추고 있지만, 멜이야말로 이 영화의 진정한 주인공일 수도 있겠다) 멜의 존재는, 포우/라캉의 ‘잃어버린 편지’가 그렇듯이, 장면들을 구성하는 사건-계열들 전체를 갑자기 반전시켜버리는 우발점(le point aléatoire)이며, 멜이 일으키는 이 우발적 사건들이 영화 전체를 극적이고 깊이 있게 만들고 있다.


꿈, 시간, 관념

영화의 도입부는 코브가 마음의 가장 깊은 곳에까지 내려가 사이토를 구해내려 했던 상황을 잠깐 비춘 후, 코브가 사이토를 처음 만났을 때로 거슬러 올라가 시작된다. 이 시작 부분은 “꿈속의 꿈”이라는 이 영화의 구도 ― 플라톤의 대화편들에 처음 등장했던 이른바 “액자 형식” ― 를 미리 보여준다. 흥미롭게도 본격적인 이야기는 현실에서 액자 속으로 들어가면서가 아니라 액자로부터 현실로 나오면서 시작된다. <공각기동대>는 현실로부터가 아니라 네트 속으로부터(또는 정보의 집적체로서의 마음/의식으로부터) 시작해 현실로 나오면서 시작된다. <매트릭스> 역시 가상세계에서 시작해서 후에 비로소 현실세계를 만나는 구도를 보여준다. 이런 흐름을 따라 <인셉션> 역시 현실세계가 아닌 다른 세계로부터 현실세계로 빠져나오는 장면을 도입부로 취하고 있다.

모든 사이버펑크 영화는 그 이야기를 가능케 해 주는, 그러나 현재로서는 공상적일 뿐인 장치들이 있다. <블레이드 러너>에서의 기억 이식, <공각기동대>에서의 전뇌화(電腦化), <매트릭스>에서의 자기잉여이미지 등이 그런 예이다. 이 장치 ― ‘결정적 장치(definite installation)’라 부를 수 있겠다 ― 는 각 사이버펑크 영화의 가능조건인 동시에 바로 그것 때문에 각 영화가 ‘공상과학’영화로 분류될 수밖에 없게 만드는 것이기도 하다. 이 결정적 장치로 말미암아 사이버펑크 영화는 극히 흥미진진하고 또 ‘존재론적’일 수 있지만, 또 다른 면에서는 결국 황당하고 좀 유치할 수밖에 없다고도 할 수 있다. 때문에 이 결정적 장치를 어떻게 설정하는가, 어떻게 기발하면서도 어느 정도는 설득력이 있어 보이게 장치하느냐 하는 것이야말로 한 사이버펑크 영화의 수준과 성공 여부를 가늠한다고 할 수 있다.

<인셉션>에서의 결정적 장치는 꿈의 공유이다. 꿈이란 한 인간의 가장 내면적인 무엇, 더 정확히 말하면 내면 속의 외면, 자아 속의 타자가 아닌가. 그런 꿈속에 문자 그대로의 바깥의 타자가 침입한다면? 꿈의 공유(여기에서는 제3의 공통장소가 아니라 특정한 누군가의 꿈으로 설정된다)라는 이 장치는 <공각기동대>에서의 전뇌화라는 장치와 특히 가까운 성격의 장치이다. 영화의 도입부는 코브, 아서, 사이토, 멜 등의 주인공들이 꿈을 공유하면서 뒤섞임 꿈들이 일으키는 창발(예컨대 코브의 아내 멜은 생면부지의 인물인 사이토의 정부로 등장한다)을 보여준다. 더 나아가 이 영화는 꿈속의 꿈, 꿈들의 주름을 그 핵심 설정으로 배치하고 있다.(비르-아케임 다리에서 아리아드네가 보여준 주름 이미지는 이 점을 상징한다) 이 설정은 이 영화의 가장 독창적인 설정으로서, 처음에는 두 겹의 꿈이, 그 후에는 세 겹의 꿈이, 마지막에는 림보에 이르기까지의 네 겹의 꿈이 이어지는 흥미의 고조가 특히 뛰어나다. 베르그송의 기억이론, 특히 ‘과거의 시트들’을 연상시키는 이 구도가 영화의 플롯을 단단하게 해 주고 있다.

각 층의 꿈들은 불연속적이면서도 또 연속적이다. 다른 층위의 꿈은 전혀 다른 구도(‘플랑’) 위에서 성립하지만, 상위의 층은 하위의 층에 영향을 미친다. 림보에 떨어졌을 때조차도 상위 층들에서의 기억이 완전히 잊히지는 않는다. 영화의 도입부에서 림보의 사이토는 코브의 토템(꿈속과 생시를 구분할 수 있게 해 주는 부표)을 보고서 “반쯤 잊힌 꿈속에서 만난 남자의 것”이라고 말한다. 꿈들이 완전히 불연속이라면 각 꿈의 세계는 완벽히 분리된 가능세계들이다. 매트릭스의 바깥을 몰랐을 때의 매트릭스는 하나의 완벽한 세계인 것처럼. 그러나 꿈들은 각각 다른 세계이면서도 이어져 있다. 무척 흥미로운 구도이다.

이 꿈들의 주름에 상응해 시간의 주름이 설정된다. 꿈의 층위를 하나씩 내려갈 때마다 시간이 5배 느려진다는(역으로 말해, 사고는 5배 빨라진다는) 이 설정은 “무의식에는 시간이 없다”는 프로이트의 시간 개념이나, 과거 속에서 지속의 연속성이 깨진다는 베르그송적 시간 개념, 또 의식의 심층에서 시간이 느려진다는 (살바도르 달리의 그림으로 유명한) 초현실주의의 시간 개념 등과 조응하면서, 이 영화 고유의 설정으로서 장착되어 있다. 꿈들의 주름과 시간의 주름이 이 영화의 결정적 설정을 이룬다.

꿈속에는 무엇이 있을까? 아니 그 이전에 인간의 마음속에는 무엇이 있을까? 영국 경험론자들이 분명히 했듯이, 바로 ‘관념들(ideas)’이 있다. 이 영화는 바로 관념들에 대한 영화이다. 하나의 관념이 마음속에서 싹트고 어느 샌가 구체화되면, 그것은 한 인간의 생각과 행동과 언어를 굳게 지배하게 된다.(“관념은 바이러스 같아. 집요하고 전염성이 강하지. 아주 작은 관념의 씨앗도 거대하게 성장해서, 너 자신을 규정하고 또 파괴하기도 해. 아주 작은 관념, 예컨대 ‘내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은 실재가 아닌 게 아닐까?’ 같은 그런 관념. 그런 작은 관념이 모든 것을 뒤바꾸어버릴 수 있지”) 그래서 주인공 코브는 하나의 관념은 “일단 뇌에 고착되면 제거는 거의 불가능하다”고 말한다. 그러나 꿈꾸는 상태에서는 의식의 응집력이 풀리고 한 인간의 관념에 대한 방어력도 약화되기 마련이다. 이런 가설에 입각해 타인의 꿈에 침투하기, 공유되는 꿈의 전체 구도를 짜기, 그의 어떤 관념을 훔쳐내기, 역으로 자신의 관념을 방어하기, 그리고 특정한 관념을, ‘관념의 씨앗’을 심기(‘inception’)라는 이 영화의 기본 스토리라인이 짜인다. 


무-의미와 역-설의 세계

“인간은 뇌의 진정한 잠재능력을 일부만 쓴다고들 하지. 깨어있을 땐 그래. 잠이 들었을 땐 마음은 거의 뭐든 다 할 수 있어.” 코브의 이 말은 중요하다. 

프로이트는 꿈이란 소원의 충족을 그 핵심 기능으로 한다고 보았다. 아울러 그는 꿈의 작용을 은유, 환유를 비롯한 언어학적 모델을 가지고서 설명하기도 했다. 프로이트에게 무의식이란 일종의 극장이고, 이 극장에서 상연되는 연극(라캉을 따르면 일종의 구조주의적 연극)은 꿈을 통해서 특히 잘 드러난다. 베르그송의 꿈 개념은 훨씬 비-합리적이다. 생시에 현재가 가지는 대상에의 ‘주목’은 과거를 원추의 꼭지점으로 쏠리게 만든다. 꿈을 꾸면서 이런 주목과 편향의 끈이 느슨해지면, 과거 속의 관념들(베르그송의 경우는 ‘이미지들’)은 새장에서 나온 새들처럼 자유롭게 부유하기에 이른다. 이로써 다양한 가능세계들이 창발되기에 이른다. <인셉션>의 세계는 프로이트보다는 베르그송에 가깝다.

잠재의식의 세계, 꿈의 세계는 무의미의 세계이다. 생시에 전혀 무관한 사람들이 만나고, 거리가 거꾸로 솟아 수직을 이루며, 차도에 갑자기 기차가 뛰어들기도 하고, 한 인물이 다른 인물로 변신하기도 하며, 공간과 시간은 뒤틀어진다. 이것은 의미 없는 세계가 아니라 무한한 의미가 섞인 세계이다. 의미는 무-의미=무한-의미의 한 결이며, 현실세계는 무한한 가능세계들의 한 면이다. 생시의 세계가 하나의 ‘해’라면, 꿈의 세계는 그것을 하나의 해로서 포함하는 ‘문제’이다. 이런 점에서 꿈의 세계는 고차원 방정식들의 세계와도 유사하다. ‘꿈’이라는 말의 두 가지 의미는 이런 맥락에서 만난다. 꿈은 현실의 근저에서 작동하는 기억/과거에서의 가능세계들의 장소이기도 하지만, 또한 주체가 설계하고 “꿈꾸는” 미래에서의 숱한 가능세계들의 장소이기도 하다.

또한 꿈의 세계는 파라-독사의 세계이기도 하다. 여기에서 파라-독사는 제논에게서처럼 평행을 달리는 두 세계가 아니다. 오히려 하나의 현실세계와 그 너머의 무한한 가능세계들을 가리킨다. 영화에서는 에스헤르(에셔)의 그림을 본 딴 건물 내부를 보여주면서 수학적인 역설들(‘폐쇄 반복 현상’, ‘펜로즈의 계단’)이나 주체와 객체의 전도 현상 같은 것을 보여주면서 역설을 말한다. 물론 훨씬 풍부한 예들이 가능할 것이다. 꿈이야말로 허구성으로 치닫지 않으면서도 파라-독사를 말할 수 있는 최적의 소재일 것이다.

<인셉션>에서 꿈의 세계와 기억의 세계는 구분되어야 한다. 코브가 아리아드네에게 “기억으로부터 장소를 재창조해서는 안 된다”고 경고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기억을 토대로 해서 꿈을 설계할 경우, 꿈속의 인물들은 이 세계가 가능세계인지 현실세계인지를 구분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인셉션>의 꿈 개념이 함축하는 중요한 측면들 중 하나는 그것이 기억을 토대로 한 현실적인 꿈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설계’된 것이라는 점이다. 이 점에서 이 영화의 각 꿈은 ‘기억’이나 ‘무의식’보다는 오히려 ‘가능세계’에 가깝다. 그러나 이 가능세계는 순수 논리적 존재가 아니라 어디까지나 누군가의, 그리고 누군가들의 잠재의식에서 성립하는 세계이다. 때문에 누군가의 마음 깊숙이 어떤 관념의 씨앗을 심기 위해서는 추상적인 생각들이 아니라 가장 원초적이고 감응적인(affective) 측면에서 접근해야 한다. 임스가 인셉션의 목표가 된 인물의 ‘생각’보다는 더 절대적으로 기본적인 것에서, 즉 그와 그의 아버지와의 관계에서 시작해야 한다고 한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실재와 가상의 전복: ‘사랑’과 ‘인식’

이 영화를 단지 흥미진진한 공상과학영화 이상으로 만들어주고 있는 결정적인 면은 바로 코브와 멜의 관계이다. 영화의 사이버펑크적인 구도와 이 두 사람의 극적인 관계가 극히 자연스럽게 녹아들어가면서 영화의 깊이와 완성도가 가능할 수 있었다고 할 수 있다. 

남녀가 서로 사랑하면서 ‘함께 늙어 가는 것’과 ‘회한에 가득 차 외롭게 늙어가는 것’의 대비가 드라마의 전체 구도를 잡아주고 있다. 코브는 기억과 설계가 뒤섞인 꿈의 세계를 만들어 끝없이 꿈같은 시간들을 반추하고, 또 회한 어린 순간들을 되돌려 그것을 바꾸기를 거듭한다.(그러나 기억이 섞여 있기에 그의 소망은 충족되지 않고, 또 이런 그의 실험이 꿈의 공유 전체를 불안정하게 만든다) 현실성의 차원에서 코브는 아내를 죽이지 않았다. 그러나 현실성과 잠재성의 관계에 있어 사실상 그는 아내를 죽였다. 그래서 그는 끝없는 가책 속에 살면서 다시 잠재성의 세계로 들어가 아내를 만난다. 살인하지 않은 코브가 사실상 (전혀 원치 않은 채) 살인했다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일까?

남편과 아내는 ‘꿈속의 꿈’이라는 관념에 매혹되었다. 매혹은 모든 강도 높은 사건의 시발점이다. 그래서 그들은 꿈속과 생시를 오가면서, 또 꿈 아래의 꿈을 실험하면서 짧은 시간과 긴 시간 사이를 오간다. 남편은 더 깊이, 더 깊이 들어가길 원하고, 세계의 전환과 시간의 변환 속에서 이들은 점차 길을 잃어버리게 된다.(코브는 처음에 더 깊은 꿈들에서의 시간 변환 개념을 이해하지 못했고, 또 이 몰이해가 가져올 결과가 무엇일지도 당연히 이해하지 못했다. 이것이 모든 비극의 씨앗이 된다) “무엇이 실재인가?” 고대의 자연철학자들이 이 물음을 제기한 이래 이것은 철학의, 특히 존재론의 핵심 물음으로서 내려왔다. 그리고 현대의 사이버펑크 영화는 집요하게 이 물음을 형상화해 왔다. “안드로이드는 인간인가?”(<블레이드 러너>) “내 영혼(고스트)은 과연 나의 영혼인가? 또, 생명/영혼이란 무엇인가?”(<공각기동대>) “로봇은 언제 인간으로 승인받을 수 있는가?”(<바이센테니얼 맨>) “내가 살고 있는 세계는 과연 실재인가?”(<매트릭스>) <인셉션> 역시 이 근본 화두에 부딪친다. 코브와 맬은 장자처럼 묻게 된다. 나는 지금 생시에서 꿈으로 왔는가, 아니면 꿈에서 생시로 왔는가?

자신들만의 세계를 만들어 가는데 도취되어 있던, 신이 된 듯한 기분으로 살아가던 부부. 어느 날 코브가 회의를 품으면서 부부의 운명은 갈린다. 어느 세계가 실재이고 어느 세계가 가상인가? 이 물음에 대해 부부가 서로 다른 해를 가지면서, 이들은 다른 길을 가게 된다. 멜은 현실세계와 가능세계를 혼동하게 되고 토템을 마음속 깊은 곳에 묻어버린다. 그리고서 림보의 깊은 꿈속에 빠져버린다. 서구 문명에서 림보가 천국과 지옥의 중간이듯이, 영화에서의 림보는 살 수도 없고(현실이 아니기에) 죽을 수도 없는(무한히 늘어지는 시간 때문에) 곳이다. 그것은 설계되지 않은 꿈, 설계가 실패로 돌아가는 무한의 잠재의식으로서, 여기에서 꿈꾸는 이는 생시를 망각한 채 길고 긴 시간을 살아간다. 림보는 베르그송의 순수과거와는 달리 기억의 선험적 조건이 아니라, 꿈의 마지막 변방이다. 생시로 돌아왔을 때 멜은 그곳이 꿈의 세계라고 믿는다. 그리고 자신에게 실재세계로서 각인되어 있는 림보로 돌아가고자 한다. 그녀에게 꿈의 세계를 가르쳐 준 것은 코브이지만 그것을 생시로 믿어버린 것은 멜이었다. 영화는 멜의 비극의 선을 따라가기보다 코브의 해피 앤딩의 선을 따라감으로써 멜을 영화의 림보로 밀어냈지만(우연의 일치일 수도 있겠지만, ‘멜’은 프랑스어로는 ‘le mal’ 즉 ‘악’이다), 사실 이 영화의 배면의 핵은 분명 멜의 비극에 있다.(영화의 엔딩 장면은 단순한 장난이 아니라 바로 이 사실 ― 라캉적 뉘앙스에서의 ‘진실’ ― 의 표현일 것이다. 사드가 칸트의 진실이듯이, 멜은 코브의 진실이다)

남편과 아내가 다른 길은 간다면? 그러나 서로 사랑하는 이들에게 이는 불가능하다. 인식에서의 길은 다르다, 그러나 삶에서의 길은 같아야 한다. 여기에 사랑하기에 함께 림보(그녀에게는 실재)로 가길 원하는 아내와 역시 사랑하기에 함께 현실에 머물고자 하는 남편 사이에서 비극이 생겨났다. 사랑하기에 함께 할 수밖에 없지만 인식이 다르기에 같은 길을 갈 수 없는 부부. <현기증>에서도 또 다른 방식으로 빼어나게 묘사되었던, ‘사랑’과 ‘인식’ 사이의 이 아픈 딜레마! 이 딜레마는 결국 멜의 죽음으로 끝난다. 부부를 잇고 있는 핵심적인 끈은 물론 아이들이다. 아내는 지금 여기(현실)가 꿈속이며 진짜 아이들에게 가려면 지금 여기에서는 죽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아내는 지금 여기가 현실이라고 잘못 알고 있는 남편을 깨우치기 위해 스스로가 먼저 죽음(깨어남)을 택한다. 남편은 지금 여기가 현실임을 알고 있었기에(남편이 옳다는 객관적인 기준은 바로 부표에 있다) 아내를 붙들고자 했지만, 바로 지금 여기는 꿈속이 아니었기에 건물과 건물 사이의 거리를 뛰어넘지는 못한다. 만일 코브가 틀렸다면(지금 여기가 꿈속이었다면), 그는 건물을 날아가 아내를 안거나 아니면 함께 뛰어내렸을 것이다. 코브에게 이 악몽 같은 ‘현실’은 ‘꿈’이 아니었기에 힘겨운 것이었다. 힘겨운 현실을 만날 때 우리는 뇌까린다. “이게 다 꿈이었으면.” 그러나 코브의 인식과 그의 소망은 결코 만날 수 없었고, <현기증>의 주인공처럼 그 역시 인식과 소망 사이에서 분열되어버린다. 반대로 아내에게 지금 여기는 림보였고, 그는 어떻게든 남편과 함께 현실(사실상 림보)로 가야 했다. 그녀가 택할 수 있는 것은 만반의 준비를 해 놓고서, 남편 앞에서 추락사하는 것뿐이었다. 영화에서 가장 착잡한 파토스로 다가오는 장면이다.

피셔가 죽어가자 코브와 아리아드네는 림보로 내려가고, 거기에서 코브는 멜과 재회하게 된다. 그러나 림보에서도 코브와 멜의 ‘인식’ 차이는 결코 좁혀지지 않는다. 그렇다면 이제 남은 것은 사랑을 포기하는 것뿐이다. 그러나 아내가 이미 죽었고 오직 림보에서만 재회할 수 있다는 사실을 확신하는 코브에게 남아 있는 것은 사랑보다는 오히려 죄책감이다. 멜로 하여금 그 위험한 관념을 심어준 사람이 바로 자신이었다는 죄책감. 코브는 림보에서 벗어나기 위해 멜의 마음 깊숙이에 “이곳은 실재가 아니다, 죽음으로써 여기를 벗어나야 한다”는 관념을 심었다. 물론 반드시 둘이서 함께. 둘이서 함께라면 죽음으로써 이 허구의 세계를 벗어날 수 있고 또 그래야 한다는 이 관념. 그러나 이 영화에서 가장 극적인 반전이 일어난다. 이 관념은 암처럼 자라서 멜의 가슴을 가득 채우고, 마침내 멜은 현실세계에서도 바로 이 관념에 의해 지배당하기에 이른다. 그리고 비극은 시작된다.

하지만 멜은 말한다. 만일 ‘함께’ 살 수 있다면 림보라면 어떻겠는가? 설사 여기가 림보라 하자. ‘함께 늙어가는 것’이 중요하다면, 왜 그곳이 꼭 현실/실재여야 하는가? 림보에서 함께 늙어갈 수 있지 않은가? 그들은 물었었다: 우리는 지금 생시에서 꿈으로 왔는가, 아니면 꿈에서 생시로 왔는가? 하지만 무엇이 ‘진실’이든 무슨 상관인가? 함께 늙어갈 수 있다면? 여기에서 다시 ‘사랑’과 ‘인식’의 딜레마가 솟아오른다. 그러나 실재와 림보의 구분을 인식하고 있는 코브는 마침내 아내(아내의 그림자)를 포기하고, 마음속 깊이 박힌 가시를 뽑아버린다. 고국으로 돌아와 아이들을 만난 코브는 행복감을 느끼지만, 가시가 뽑힌 자리가 아물 수 있을까? 쓰러질 것 같기도 하고 계속 돌아갈 것 같기도 한 팽이의 모습은 우리로 하여금 마침내 아이들을 만난 코브의 행복과 뽑혀진 가시로서의 멜의 비극을, 끝나지 않은 딜레마를 계속 반추하게 만든다.

유목미학

 

숙경


 

 

유목미학[각주:1]은 들뢰즈(Gilles Deleuze1925~1995)의 ‘유목론[각주:2]’을 이론적 바탕으로 하여 만들어진 새로운 미학 장르이다. 들뢰즈 철학에 있어서 유목론이 차지하는 비중은 자못 크다고 할 수 있겠는데, 유목론에는 ‘잠재성’, ‘다양체’, ‘리좀’과 같은 들뢰즈 철학의 핵심 개념들이 상징적으로 함축되어 있기 때문이다. 철학사적 맥락에서 살펴볼 때, 들뢰즈 철학의 위상은 서구 전통 사상의 중심 테마라 할 수 있는 ‘이데아의 모방’ 혹은 ‘형상(形相)의 재현’ 으로부터 가장 먼 곳에 자리하고 있다. 요컨대 들뢰즈 철학이 추구하는 바는 ‘재현’이 아닌 ‘창조’에 있는 것이다. 유목미학은 이와 같은 들뢰즈 철학을 바탕으로 하여 창조적 해석과 변용을 꾀하고자 만들어졌다. 바로 존재의 창조적 속성에 의한 다양한 변주가 유목미학의 중심 테마가 되는 것이다.



1. 유목론의 철학적 특성

 

유목론을 이끌어 가는 핵심 키워드 중의 하나는 ‘방목(放牧)’[각주:3]이다. 방목에는 앞서 언급한 잠재성, 리좀, 다양체의 원리들이 고스란히 함축되어 있다. 따라서 방목의 성격을 정확히 이해하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유목론의 핵심에 다가갈 수 있다.

일정한 장소에 머물러 살아가는 정착민과 달리 목축을 주업으로 삼아 삶을 영위하는 유목민은 가축을 방목하며 물과 풀을 찾아 이리저리 떠도는 생활습성을 지니고 있다. 정착민의 영토가 울타리나 소유지로 규정되어 있고, 그 규정된 장소에 사람들과 가축들이 분배된다면, 소유지도 울타리도 없는 유목민의 영토는 미리 규정되거나 제한되지 않은 열린 공간 안에서 오히려 사람과 가축에 의해 분배되고 결정된다. 이와 같은 유목 방식에는 몇 가지 중요한 철학적 의미가 함축되어 있다.

경계가 분명한 정착민의 소유지와 그 안에 배분되는 가축들의 움직임은 이미 짜여진 공간의 재현이라고 하는 구조적 의미가 깔려있는 반면, 경계 없는 유목민의 영토에서 방목되는 가축들은 무 규정의 공간에서 스스로 자신의 공간을 열어가고 창조해 간다고 하는 생성론의 의미가 함축되어 있다. 유목론은 곧 생성론의 상징에 다름 아닌 것이다. 들뢰즈는 그의 저서 『차이와 반복』에서 이와 같은 방목의 특성에 대해 ‘악마적’이라는 표현을 쓰고 있는데, 이는 방목이 ‘소유지’라고 하는 규정된 공간의 질서를 어지럽힘으로써, 재현이라고 하는 정착적 구조를 전복시키는 혼란을 야기하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유목론이 시사하는 바는 전통 형이상학의 존재론을 뒤엎는 사고의 획기적인 전환에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 전환에는 개체들이 미리 규정된 존재의 법칙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거꾸로 개체들이 스스로 존재를 생성하고 구축해간다고 하는 생성존재론의 의미가 깔려있다.

그러나 유목민의 영토가 유동적이라고 해서 무한대로 열린 공간은 아니라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유목이라고 하는 생활 형태는 물론 한 곳에 정주하지 않고 끊임없이 이동하는 습성을 가지나, 그렇다고 해서 되는대로 무작정 떠돌아다니는 것은 아니다. 정착민의 공간처럼 고정적인 것은 아니지만, 유목민들도 나름대로 정해진 영토 안에서 자연의 변화 등에 의해 관습화된 궤적을 따라 이동한다. 유목민이 정주민과 정확히 다른 점은 영토를 점유하고 상주하는 것이 아닌 일정 기간 머물렀던 지점으로부터 반드시 떠나야 한다는 것이다. 이 같은 사실은 유목론을 단순한 생성론의 범주에서 이탈시키는 결정적인 변수로 작용한다.

유목민의 영토가 일정 공간과 궤적에 한정되어 있다는 사실로부터 우리는 유목론이 구조주의적 입장을 완전히 버리지 않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한 편 그 공간이 고정불변의 것이 아니고 환경의 변화와 유목민의 이동에 따라 가변적이고 유동적이라는 점에서는 다시 구조주의를 넘어선다. 유목론에는 이른바 구조와 생성, 어느 것도 버리지 않고 함께 사유하고자 하는 의도가 깔려 있는데, 이 점이 바로 들뢰즈가 ‘포스트구조주의자’로 불리는 이유이기도 하다. 따라서 유목론에서는 장(field)과 운동이 함께 사유된다.

실상 장과 운동은 독립된 요소가 아니므로 따로 떼어 설명한다는 자체에 무리가 따르는 일일 것이다. 그런 점에 있어서, ‘다양체’와 ‘리좀’ 그리고 ‘잠재성’을 각각 분리하여 독립적으로 설명하는 것에도 무리가 없지 않을 것이나, 유목론의 철학적 분석을 위해 편의상 분리해서 설명하기로 한다.

 

(1) 다양체(multiplicity)

들뢰즈는 유목민의 운동이 '공간 이동'이 아닌 '제자리 운동'이라는 주장을 통해 '제자리에서 유목하기'라고 하는 독특한 발상을 전개한다. 일견 모순되어 보이는 이 같은 견해는 유목민의 생활터전이 건조한 스텝지역에 국한된다는 조건과 부합되어 설득력을 얻는다. 그들은 늘 이동하지만 실상 한 번도 자신의 영토를 벗어나 본 적이 없다. 설사 그들의 궤적 공간이 확대된다 해도 그것은 그들이 영토를 이탈한 것이 아니라 건조화 등 기후의 변화로 인해 영토가 확장된 결과일 뿐이다. 따라서 유목민은 늘 어딘가를 향해 떠나지만 정작 거주지를 버리고 떠나는 것은 정착민일지언정 유목민은 아니다. 정착민에게 있어서 이동이란 터전을 버리고 떠나는 것, 다시 말해 완전한 ‘이주(移住)’를 뜻하지만, 유목민에게 있어서 이동은 터전 안에서 쉬지 않고 순환하는 '제자리 운동'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유목민의 영토는 비록 한정되어 있을지라도 그들의 이동에 의해 수시로 그 위상이 변한다. 이로부터 하나의 중요한 상징적 의미가 포착되는데, 전통 존재론인 재현 방식은 공간적 차이, 양적 차이를 수반하지만, 유목론에서는 시간적 차이, 질적 차이가 존재의 근거가 되고 있다는 것이다. 본거지 자체가 바뀌는 정착민의 이동은 재현의 전통에서 개체의 차이가 곧 원본의 차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가 하면 이동에 따라 영토 자체의 위상이 수시로 바뀌는 유목론에서는 하나의 원본 안에 무수한 질적 차이가 존재함을 말해준다. 따라서 유목론에 있어서 존재란 재현으로 실현 불가능한 것이 되고 만다. 담과 도로에 의해 일정하게 구획된 공간에서 이루어지는 정착민의 행적이 규정된 '공간의 재현'이라고 한다면, 담도 도로도 없는 무 규정의 공간에서 이동과 정지의 여정을 병치해 가는 유목민의 행적은 스스로 도로와 거주지를 만들어 가는 '공간의 창조'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처럼 유목론에 있어서의 존재 방식은 선(先) 존재하는 '동일성의 재현'이 아닌 무수한 차이들(개체들)간의 접속과 배치로 만들어 가는 '동일성의 창조(혹은 구축)'라 하겠다. 그러나 이때의 동일성은 유일한 것도 고정불변 하는 것도 아니다. 유목민의 공간은 이동과 함께 옮겨지고 옮겨짐과 동시에 지워지는 미 규정된 경로에 의해서만 구분된다. 유목민에게 있어서 거주라는 개념도 정주민의 거주지처럼 부동의 공간이 아니라 그들의 궤적을 따라 끊임없이 이동한다. 그들이 비록 관습적인 궤적을 따라 이동한다 해도 모든 지점은 중계점으로만 존재하며 정주민의 공간처럼 영구히 점유되는 것이 아니다.

이처럼 유목민의 삶에 있어서 영토의 의미는 결코 고정적인 것도, 영구불변의 것도 아니다. 규정되고 다시 해체되기를 반복하는 유목민의 영토처럼 그렇게 가변적이고 유동적이고 복수적인 동일성을 들뢰즈는 ‘다양체’라고 부른다. 요컨대 ‘동일성이 다양체로 대체’되는 것이다. 여기서 보다 중요한 지점은 동일성이 선(先) 존재로서 모든 존재의 근원이라고 한다면, 다양체는 차이들, 개체들 간의 생성운동의 결과로 구축된 불완전한 창조물이라는 것이다. 이른바 ‘차이생성(differentiation)’이 동일성을 구축하는 것이다. 들뢰즈는 이와 같은 다양체의 생성 원리를 특정식물의 생식에 비유하여 설명하고 있는데 그것이 바로 ‘리좀’[각주:4]이다.

 

(2) 리좀(Rhizome)

리좀은 중심뿌리의 지배하에 폐쇄적이고 단일한 위계질서를 형성하는 수목형(樹木形) 나무뿌리와 달리, 중심뿌리가 제거된 채 줄기에서 직접 분기한 개개의 땅속줄기들이 횡적으로 직접 접속하는 열린 체계를 이룬다. 따라서 수목형(樹木形) 나무뿌리가 무수한 잔뿌리들의 차이를 모두 흡수하여 하나의 중심으로 환원시키는 반면, 비유기적으로 단절되고 이질적인 것들 간에 직접 접속하는 리좀은 접속되는 항들이 늘거나 줆에 따라 성질이 달라지는 가변적 체계를 형성하게 되는 것이다. 이와 같은 리좀의 원리는 한 지점에서 다른 지점으로 이동함에 따라 영토 자체의 위상이 수시로 바뀌는 유목의 속성을 고스란히 반영하고 있다. 따라서 관건은 ‘접속’에 있다. 접속만이 유일한 존재의 근거가 된다.

수목형 구조

  왼쪽 하단이 '리좀' (Attribution : Wackymacs at en.wikipedia.org)

  

 

어떻게 접속하고 해체되느냐에 따라 존재는 무수한 질적 차이를 수반한 다양체로 구축되기도 하고, 다시 해체되기도 한다. 따라서 리좀의 세계, 다양체의 세계에 있어서 ‘일점 근원의 신화나 궁극적으로 도달해야 할 목적지’[각주:5]는 그 의미를 상실하고 만다. 모든 존재는 시작과 끝이 아닌 ‘중간(中途)’에서 이루어지며 중간은 다름 아닌 접속이 이루어지는 곳이다. 접속은 그 자체로 운동이며 접속을 통해서만 생성과 변화가 일어난다. 그러나 시작과 끝은 운동이 멈춘 지점으로 그런 의미에서 존재와는 무관하다. 유목 또한 중간에서 이루어진다. 유목민에게 있어서 유목의 시작과 끝은 없다고 보아 무방할 것이다. 유목민의 행적에 정확한 출발지도, 뚜렷한 목적지도 없다. 따라서 유목민의 주거는 고정된 영토가 아닌 과정으로서의 ‘여정’이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여정 중에 어느 지점과 접속하고 배치를 이루면 그게 바로 거주지가 되는 것이다. 이렇게 여정의 의미가 강조 될 때 출발점과 도착점은 의미를 상실하고 유목은 오직 여정이 이루어지는 중간지대 - 중도(中途)가 실제적 의미로 부각 된다. 그렇다면 정해진 담도 도로도 없는 유목민의 공간에서 거주지와 궤적은 어떻게 결정되는가? 이를 철학적 의미로 담론화하면, 형상의 재현을 벗어난 존재의 발생은 어디로부터 오는가? 그 의문에 대한 답을 얻기 하기 위해서는 유목론의 구조적 특징을 함축하고 있는 잠재성으로 논의 장을 옮겨가야 한다.

 

(3) 잠재성(virtuality)

유목민들의 이동과 거주의 경로는 '기계(개체)[각주:6]-접속-배치(다양체)'의 리좀 라인을 이루며 유목의 대지 안에 잠재해 있다. 따라서 유목론은 ‘잠재성의 철학’, 보다 넓은 의미에서 ‘내재성의 철학’이라고 할 수 있다. 내재성의 철학이란 존재의 근원이 존재의 밖에 있지 않고, 존재 자체에 있음을 의미한다. 초월성이 초월적 존재의 근원을 현실에 투사하는 것이라면 내재성은 역으로 잠재된 존재가 현실로 구현되는 것이다. 그러나 무수히 많은 유목경로들이 대지에 잠재해 있다 해서 어떤 보물이 땅속에 매장되어 있다가 발굴되듯이 차례로 노출되는 성질의 것은 아니다. 그와 달리 유목공간의 형성은 잠재되어 있는 발생 가능한 리좀 계열들이 마치 ‘카드의 패를 던지듯이’ 또는 ‘바둑판 위의 어느 지점에 바둑알이 놓여지듯이’ 그렇게 접속과 동시에 발생한다. 카드 속에는 무수한 카드의 패가, 바둑판에는 무수한 바둑의 위상이 잠재해 있다가 어느 순간 현실성으로 부상하는 것이다.[각주:7]

잠재성의 성격은 들뢰즈 철학 개념의 하나인 ‘탈기관체(脫器官體:body without organs)’의 성격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탈기관체는 기관이 없는 몸이 아닌 기관이 유기적으로 조직되어 있지 않은 상태를 의미한다. 이처럼 몸의 기관들이 아직 조직화되어 있지 않은 탈기관체는 무수한 조직화의 계열이 잠재되어 있는 ‘알’과 같은 상태라고 할 수 있다. 여기서 우리는 잠재성의 존재가 ‘미 규정성’의 의미를 함축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잠재성이 현실화되기 위해서는 수많은 조건들과의 접속을 필요로 한다. 접속을 통해 잠재성은 비로소 현실화 되는 것이다.

이상으로 유목론을 크게 잠재성, 리좀, 다양체의 원리로 분석해보았으며, 유목미학은 그 원리들을 바탕으로 다양한 장르를 해석하고, 장르를 초월한 변용과 창작의 과정으로 확산된다. 그 중 한 예로 유목론의 주요 개념들을 중앙아시아 예술 분석을 위한 아우트라인에 간단히 적용해 보기로 한다.


 

2. 유목론의 창조적 해석과 변용 - 중앙아시아 미학

 

(1) 잠재성

중앙아시아라고 하는 공간은 지리적으로 유라시아 대륙의 한가운데 위치하고 있으며 예로부터 실크로드를 통한 동서교역의 중심지이자 온갖 문물이 교류하는 문명의 교차로 역할을 해왔다. 세계 각지의 종교와 문화, 예술 역시 실크로드를 통해 중아아시아로 흘러들어와 다양한 접속의 장을 형성하게 된다. 중앙아시아에는 불교와 이슬람교 뿐만 아니라 고대 페르시아에서 발생한 조로아스터교, 인도의 브라만교와 힌두교, 자이나교, 중국의 유교와 도교, 그 외에도 그리스 로마에서 흘러들어온 갖가지 신화와 종교 등 수많은 종교와 사상들이 혼재했다. 이 같은 특성상 고대 중앙아시아 지역에는 전체를 통일하는 중심 원리도, 하나의 규범을 세우는 오랜 전통도 가지고 있지 않았으며, 또한 모든 사상과 문화를 결속하는 거대한 유기적 체계도 갖추어져 있지 않았다. 중앙아시아는 바로 유라시아 각지에서 모여든 다양한 문화적 요소들이 미립자의 상태로 북적대는 곳, 아직 태어나지 않았지만 생명을 배태한 알처럼, 무수한 리좀 계열들과 다양체들을 가능태로 품고 있는 거대한 잠재성의 장인 것이다.

 

(2) 리좀

리좀은 그 자체로 시작도 끝도 아닌 ‘중간’만을 갖는다. 접속이 이루어지는 곳은 시작도 끝도 아닌 중간지대이기 때문이다. 중앙아시아는 접속과 배치가 이루어지는 ‘중간지대’이다. 그곳에 모여든 온갖 종류의 사상과 문화는 그 하나하나가 독립된 기계들로서, 다른 문화와 만나서 접속하는 양상에 따라 그 성질이 달라지는 가변적 체계를 이루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중앙아시아는 무수한 리좀의 장이라 해도 좋을 것이다. 이곳에서는 ‘원형’조차도 큰 의미를 갖지 못한다. 첫 근원지를 묻지도 않으며, 마침내 도달해야 할 목적지도 상정하지 않는다. 시작도 끝도, 중심도 주변도, 근원도 파생도 없이 오로지 만남과 접속이 이루어지는 곳, 따라서 중요한 것은 ‘원본’이 아니라 ‘접속’에 있다. 그렇게 시작과 끝이 없는 중간지대, 중앙아시아는 끊임없는 접속을 통해 무수한 ‘질적 차이-다양체’를 낳는 곳이다.


(3) 다양체

중앙아시아의 아프로디테 상. 중앙아시아로 오면서 어깨에 날개가 돋혔다.

중앙아시아에 흘러든 그리스의 신들은 더 이상 그리스 고유의 신들이 아니다. 그들은 먼 이국땅에 들어와 일단 안착하게 되면 그 지역의 다른 문화와 접속하여 다양한 질적 변화를 일으키기 때문이다. 승리의 여신 니케는 고대 페르시아 땅인 파르티아에 날아오면, 날개를 접고 지모신(地母神)의 성격으로 변하여 대지를 수호한다. 미의 여신 아프로디테 역시 파르티아와 간다라 지방을 통과하면서 그녀의 관능미는 질적 변화를 꾀해 생산을 관장하는 ‘풍요의 여신’으로 탈바꿈한다. 그런가 하면 그리스 최고신인 제우스는 몸소 중앙아시아의 간다라 지방까지 건너와서 붓다의 협시(挾侍)인 바즈라파니(금강역사)가 된다. 헤르메스와 디오뉘소스도 제우스를 따르는데 이를테면 그리스 신들이 단체로 불교에 귀의한 셈이 되는 것이다. 힘과 용맹의 상징인 헤라클레스의 경우는 보다 다양한 접속을 꾀하게 되는데, 그리스 땅을 떠나 가장 먼저 다다른 파르티아에서 그는 조로아스터교의 전승신(戰勝神) 베레트라그나와 접속하여 승리의 신으로 거듭난다. 그곳에서 많은 신도를 확보한 헤라클레스는 그 후 보다 동쪽으로 진입하여 박트리아(지금의 아프가니스탄) 지방에 이르면 불교와 접속하여 붓다의 협시가 되는데, 용맹하고 진취적인 헤라클레스는 이에 멈추지 않고 북방 실크로드를 따라 돈황 등지에 이르러 사찰과 불법을 수호하는 사천왕이 된다. 그리고 그곳에서 이번에는 역류한 중국 불교와 접속하여 인왕(仁王)상이 된다.

 

 

바즈라파니가 된 그리스 신들, 왼쪽부터 헤르메스, 디오뉘소스, 제우스, 사티로스(판) 바즈라파니(金剛力士)는 붓다의 수호상으로 손에 바즈라(금강저)를 들고 있다.


 

붓다의 협시가 된 헤라클레스. 어깨에는 사자 가죽을 걸치고 있다. 그리스 신화에서 헤라클레스는 맨손으로 사자를 때려잡았는데 그 후로 사자 가죽을 머리에 쓰거나 어깨에 걸치고 다녔다고 한다.

 

 

 

3. 유목미학이 나아갈 길


초월성의 철학에서 모든 존재는 ‘재현’의 원리를 따르는 반면 내재성의 철학, 잠재성의 철학에서 모든 존재는 창조의 원리를 따른다. 그렇다면 새삼 창조란 무엇인가? 굳이 '하늘 아래 새로울 것이 없다'라는 해묵은 격언을 들먹이지 않더라도 잠재성의 현실화, 그리고 리좀의 원리는 다음과 같이 말해주고 있다. 창조란 어느 먼 하늘에서 뚝 떨어지는 것도, 공허의 대지에서 불쑥 솟아오르는 것도 아니라는 것을...

무수한 다양체들이 북적되는 잠재성의 장 - 선험의 장에서 접속을 통해 배치를 이루는 것이 바로 창조가 된다. 그런 의미에서 창조의 실마리는 '접속'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기존에 있는 언어와 언어가 접속해서 새로운 사상을 수립하고, 기존에 있는 선과 선이 접속해서 새로운 예술을 탄생시킨다. 이 글의 시작에서 유목미학은 재현이 아닌 창조에 관한 이야기라고 서언(序言)했다. 이제 부언(附言)하건대 유목미학은 세상의 모든 ‘접속’에 관한 이야기다.

정주민에 있어서 삶의 궤적이 담과 도로에 의해 제한되어 있듯이 미학 역시 형식과 규범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는 오랜 재현의 전통 속에 있었다. 담과 도로가 없는 유목공간은 형식과 규범의 제약을 받지 않는다. 이 공간에서 더 이상 개념은 개념에만 머물지 않으며, 감각은 감각에만 머물지 않는다. 개념과 감각은 상호 간에 자유로이 넘나들며 접속하고, 접속을 통해 수많은 다양체들을 만들어간다. 유목미학이 나아갈 길은 세상 모든 개념들이 감각의 통로를 타고 지각으로 탄생하는 것, 그렇게 “개념을 에둘러 살아있는 노래, 외침이 되게 하는 것”이다.


  1. ‘유목미학’이라고 하는 용어는 필자에 의해 고안된 신조어(新造語)이며, 유목미학의 주제와 내용은 들뢰즈의 유목론을 바탕으로 하여 논의의 지평을 확대하고 창조적으로 변용하였다. [본문으로]
  2. 유목론(Nomadology)은 들뢰즈 사상에서 빼놓을 수 없는 핵심 이론 가운데 하나이다. 유목론에 관한 내용은 들뢰즈 가타리의 공저『천의 고원』(1980)에 집중적으로 등장하고 있지만 들뢰즈의 초기 저서인『차이와 반복』(1968),『의미의 논리』(1969)를 비롯하여 이후로 발표된 저서와 논문에서도 꾸준히 등장하고 있다. [본문으로]
  3. 호메로스 시대에는 방목장의 울타리나 소유지 개념이 없었다고 한다. 당시 그 사회에서는 정해진 땅을 가축들에게 분배하는 것이 아니라 거꾸로 가축들을 숲이나 산등성이 같이 한정되지 않은 공간 여기저기에 풀어놓아 스스로 공간을 점유해 가게 했다는 것이다. 따라서 방목의 장소에는 명확한 경계가 없었는데, ‘경계 없는 공간’이라는 뜻의 ‘노마드’도 이로부터 성립한다. 유목민을 뜻하는 노마드(nomad)의 어원은 그리스어 노모스(nomos)에서 유래된 것으로 노모스는 관습이나 법 이외에 ‘경계 없는 공간’이라는 의미도 가진다. [본문으로]
  4. 리좀은 땅 밑 줄기(또는 땅 속 줄기)를 이르는 말로 들뢰즈 가타리의『천의 고원』에서 수목형(樹木形)에 대비되는 개념으로 함께 등장한다. 수목형과 리좀형은 각각 전통존재론과 차이생성론을 상징한다. 모든 존재가 하나의 중심으로 환원되는 전통 형이상학의 초월적 사유는 모든 뿌리들이 하나의 중심뿌리로 귀착되는, 다시 말해 하나의 뿌리를 중심으로 모든 곁뿌리들이 뻗어가는 수목형 사유체계이다. 그러므로 모든 존재의 근원을 향해 거슬러 올라 이데아, 신, 주체와 같은 존재의 제1원인을 찾아내고 그것을 통해 모든 존재를 설명하는 초월성의 사유체계는 다름 아닌 수목형 사유체계가 되는 것이다. 한 편 중심이 제거된 체계 속에서 발생과 변형을 존재의 특징으로 하는 차이생성론은 중심뿌리 없이 줄기자체가 분기하여 각각 뿌리역할을 하는 리좀형 사유체계에 비유할 수 있을 것이다. [본문으로]
  5. 이 문구는 플라톤의 이데아론에서 헤겔의 변증법에 이르기까지 전통 형이상학의 모든 사유를 함축하는 의미로 많이 쓰인다. [본문으로]
  6. 들뢰즈는 개체(an individual)를 기계(machine)로 표현하고 있는데, 이는 개체 자체보다는 ‘접속’에 비중을 두기 위한 의도로 해석할 수 있다. 존재의 비중이 어떤 보편적 존재나 혹은 개체 하나 하나에 있는 것이 아니라, 개체들 간의 접속에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그것은 기계를 복잡한 기계(complex machine)가 아닌 나사와 같은 단순 부품으로서의 기계(simple machine)로 설명한데서도 확인 할 수 있다. 하나의 부품은 다른 부품과 연결 접속됨으로써만 존재의 성질이 부여된다. [본문으로]
  7. 잠재성의 분화(현실화)에 관해서는 이정우의 『사건의 철학』(그린비, 2011) 1부 5강을 참조할 것. [본문으로]